[스포주의] 늑대와 향신료 15권 리뷰 -다르게 흐르는 시간-
필자가 그동안 걸핏하면 인용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같이 갈 수 없다.' 이 구절은 영원을 살아가는 존재와 찰나를 살아가는 존재가 만나 서로 사랑하지만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관계를 필자가 멋대로 빗댄 것인데요. 이 작품에서는 호로와 로렌스가 그러합니다. 이교의 신(神)으로써 영원을 살아가는 늑대의 화신인 현랑 호로와 인간으로써 찰나의 시간을 살아가는 로렌스가 만나 여행을 하고 티격태격하고 위기를 맞아하고 사선을 넘나드는 사이에 서로가 호감을 품고 미래를 설계하지만 결코 같은 시간대에 살 수 없다는, 그럼에도 같은 시간대에 살았다는 증거는 여기에 있다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은 애잔하기 그지없습니다.
호로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고향 요이츠를 목전에 두고 도착한 광산 도시 '레스코'에서 자신의 동료의 이름을 딴 '뮤리 용병대'를 만난 호로는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로렌스에게 있어선 연적이 될 동료를 만났다는 기쁨도 잠시 이빨과 발톱이라는 용기를 가진 자부터 죽어간다는 진리를 실천하는 것처럼 운명은 호로를 외면하였습니다. 그 어디에도 동료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없을 때 멸망해버린 고향, 뿔뿔히 흩어진 동료, 세상에 혼자 남겨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로렌스라는 온기에 기대에 여기까지 왔건만, 동료의 유품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그녀가 상당히 애처롭게 다가옵니다.
동료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과 고향이 지척이라는 두근거림에 의지해 여기까지 왔던 그녀, 또다시 세상에 혼자 남겨진 외로움과 슬픔에 망가지기 일보 직전까지 갑니다. 하지만 로렌스의 극진한 보살핌에 서서히 기력을 회복하면서 그녀에게 있어서 지금 곁에 있는 건 누구인지 새삼 알아가는 대목은 잔잔한 여운을 남깁니다.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도 로렌스가 거기에 있는지 확인하는 그녀, 마치 신기루처럼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이 거짓이 아닐까, 자신이 잠들어 버렸을 때 시간이 흘러 그가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리지 않을까, 그녀는 보리밭 근처에 심어진 나무가 거목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앉아서 지켜본 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호로에게 있어서 로렌스는 거목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그야말로 찰나를 살아가는 존재이겠죠.
이 모든 과정을 그리는 장면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시적인 구절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로렌스가 호로를 생각하며 욾조리는 말 하나하나가 가슴에 와닿습니다. 자신은 찰나를 살아가는 존재라서 시간이 없다지만 정작 시간이 없는 건 그녀라고, 무수히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신은 그저 그녀의 기억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을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렇기에 예전 18권이 언급되기 전의 광고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수명이 다해 죽어버린 로렌스와의 여행을 추억하며 '그와 다시 여행을 하고 싶다.(비슷할 겁니다.)' 이번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이 구절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서로가 다르게 흐르는 시간일지라도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같이 손잡고 미래를 설계하는 장면은 훈훈하다기 보다 애잔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레스코에서 자신의 가게를 차리려는 로렌스, 그의 곁에서 같이 가게를 도우며 '여긴 내 방, 아이의 이름을 지어야지?' 라는 등 마치 모래성처럼 언제 부서질지 모를 불안한 미래는 읽는 내내 답답함을 자아냈군요. 동료가 없다는 슬픔을 이겨내고 그가 옆에 있기에 외롭지 않다는 걸 알아가는 호로, 하지만 언제 이런 애틋한 사랑을 해봤어야 알지 같은 모습을 보이는 로렌스를 바라보며 입이 샐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그나저나 이번 15권 표지는 꽤 잘 나왔지 않나 합니다. 그동안 본편하곤 하등 관계없는 이미지여서 괴리감이 상당했는데 이번 표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호로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달까요. 100년은 동굴에 틀어박힐 자신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런 그녀를 행상인 길을 포기하면서까지 붙잡으려 노력하는 로렌스는 외줄 타기처럼 아슬하기 그지없습니다. 망가져가는 그녀를 이끌어주고 그녀의 기분을 망치는 함정을 밟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는 모습에서 과연 연애란 무엇일까 하는 고찰을 되새기게도 합니다. 그것은 신뢰와 끝없는 희생이 아닐까도 싶었군요.
맺으며, 물론 이런 가슴 아픈 연애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고 콜을 떠나보내는 장면 또한 애처롭기 그지없습니다. 이교의 신을 믿는 고향을 교회의 침략에서 구하기 위해 교회의 요직에 앉아 고향을 보살필 목적으로 신학교에 들어갔건만 사기를 당해 학교에서 도망치듯 세상 밖으로 나왔던 콜을 주워 극진히도 보살폈던 호로였기에, 큰 뜻을 품고 있는 콜을 언제까지고 품고 있을 순 없어 놓아주는, 그 얼굴은 마치 수많은 사람을 배웅하고 또 배웅하는 데에 이력이 난 자의 얼굴이라는 로렌스의 평가에서 머지않아 로렌스와 호로의 관계도 이런 수순으로 헤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에서 초반부터 엄청 먹먹해지기도 했군요.
그 외에 레스코에서 일어나는 데바우 상회의 꿍꿍이라든지 뮤리 용병대와의 일화라든지 구구절절한 이야기도 많지만 생략했습니다. 상업적인 이야기는 언제나 위기를 맞이하다가도 호로의 지혜와 로렌스의 쪼랩 배짱으로 어떻게든 되는 기승전결을 보여주는 작품이기에 크게 언급할 건 없고요. 다만 후반부 떠나갔던 콜의 물품을 들고 온 어떤 존재에 의해 또다시 이들의 관계를 시기하듯 찾아오는 위기는 범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다만 이미 완결이 났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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