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내미가 온 동네를 쏘다니며 자신의 아버지는 [적귀]라는 이명을 가진 실력자라고 떠벌린 덕분에 나이 40이 넘은 아버지는 죽을 맛입니다. 젊었을 적 고향을 뛰쳐나가 모험가가 되었지만 얼마 못 가 한쪽 다리를 잃어버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의 냉대를 받아야만 했죠. 고향을 버린 놈, 한쪽 다리가 없는 반푼이라는 조소 속에서 아버지는 끊임없는 노력 끝에 다시 마을에 받아들여졌지만 이미 나이는 어느덧 불혹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덧없는 인생에서 그나마 위안이었던 건 숲에서 주운 딸내미가 있었다는 것, 딸내미는 말썽 하나 안 부리고 무사히 성장하였고 이내 자신을 따라 모험가의 길을 들어섰던 딸은 어느덧 S랭크라는 아무도 무시 못 할 경지에 올랐습니다. 그런 딸내미에게 지금 한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는데요.

 

고아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안젤린의 동료 아넷사와 밀리엄 또한 고아원 출신이죠. 작중 표현은 안 되어 있지만 으레 판타지같이 중세 시대를 표방한 작품에서 아이가 버려지는 건 흔한 일입니다. 안젤린 또한 숲에 버려졌었고, 그녀의 아버지 벨그리프가 주워다 길러 주었죠. 아이가 버려지는 세상입니다. 정상적인 개념을 가진 아이라면 자신을 길러준 아버지의 은혜를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지 않을까요. 어느덧 아버지 나이 42살, 아버지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안젤린은 노년을 쓸쓸하게 보낸다는 느닷없는 생각이 들어 엄마를 붙여준다면 그나마 덜 쓸쓸하겠지? 하며 신부 후보를 찾아 나섭니다. 모험가를 하며 인연이 닿은 여성들을 만나 우리 아버지 괜찮은데 만나볼래? 선 볼래? 내 엄마가 되어 줄래? 이러고 다녀요. 그런데 녹록지가 않습니다. 내 마음속 아버지는 대단한 사람인데 어째서 아무도 몰라줄까.

 

그 시점, 아버지는 뭐하고 있냐면요. 딸내미의 걱정과는 반대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이미 귀족 3자매의 구애를 받고 있고, 딸내미가 방방곡곡 쏘다니며 [적귀]라는 이명을 퍼트리는 바람에 한수 배우고자 도끼 전사가 찾아와 눌러 앉아요. 새장 속 새가 되고 싶지 않다며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 망나니 엘프 공주를 찾기 위해 노엘프(노인)가 그의 집을 방문합니다. 그 노엘프 또한 여기서 기다리다 보면 엘프 공주가 제 발로 찾아오겠지 하며 눌러 앉아 버리는군요. 그리고 3명(벨그리프, 도끼 전사, 노엘프)은 의기투합하여 마을 사람들과 술잔치를 벌이고 대련을 하며 세상사 무엇이 걱정이냐는 듯 껄껄거리는 인생을 만끽하죠. 그리고 그쯤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일명 교과서적으로만 살아가는 엘프 공주는 숲에서 마왕과 대치중이었습니다.

 

 

다시 안젤린의 시점, 엄마 찾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어떡하나 싶은 심정으로 밤길을 걷는 그녀에게 이전에 보르도(아버지에게 어프로치 중인 귀족 3자매가 사는 곳)에서 언데드 사건을 일으켰던 '샤를로테'라는 10살짜리 소녀와 '벡'이라는 소년을 다시 만납니다. 어떤 인연이 있어 보르도에 들렸던 부녀(父女)에 의해 격퇴는 되었으나, 여기서 또 만나게 되는군요. 이에 또 싸울래?라며 으르렁거리는 안젤린에게 뜻하지 않는 일이 벌어지게 되죠. 찾고 있는 엄마는 보이지 않는데 인연이란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동생을 둘이나 얻게 되다니 세상사 참 모를 일입니다. 마왕을 부활 시키려는 사교의 꾐에 넘어가 사기와 사람들이 죽을 정도로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녔던 소녀 샤를로테, 보르도에서 자신을 탓하기 보다 감싸주었던 아저씨(벨그리프)를 만난 계기가 그녀의 마음에 어떤 파장을 불러온 것일까. 그때 [적귀]의 전설은 허구가 아니었다는 걸 보여주었던 아저씨.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지어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샤를로테의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아니면 교황청에서 추기경을 할 만큼 권력자였던 아버지가 권력 다툼에 밀려나 딸을 살리고 죽어버린 것에 원한을 잊지 못해 나쁜 길로 들어선 그녀에게 동정심이 일어난 것일까. 보르도에서 사람이 죽을 정도로 큰 사건을 일으킨 이들의 목을 당장에라도 처야 되건만 안젤린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는 듯, 샤를로테와 벡을 보호하며 이들을 노리는 자객으로부터 지켜나가기 시작하는데요. 사를로테와 벡이 사교를 배신한데다 교황청이 전(前) 추기경의 딸인 샤를로테가 정적의 구심점이 되어 자신들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한 거죠. 이에 안젤린은 졸지에 두 곳에서 보내오는 자객과 대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지만 누군가를 지킨다는 신념을 가진 그녀를 꺾을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다시 아버지 시점, 망나니 엘프 공주가 위기에 빠집니다. 마왕을 죽여서 명성을 얻겠다며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교과서적인 배움만으로 본질을 꿰똟지 못하는 우둔함만 가진 그녀는 기어이 목이 떨어질 위기에 처하게 돼요. 그리고 개입하는 아저씨, 또다시 객식구나 늘어납니다. 목숨이 구해지고도 엘프 공주는 큰숙부가 되는 노엘프의 가르침은 귓등으로 들으려 하지 않고 고집만 피워대니 이거 참, 여기서 아이들의 우상 벨그리프가 나설 차례군요. 말을 안 듣는 아이는 때려서라도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굴곡을 전해주며 겉으론 온화한데 속을 들여다보면 너 그러다 객사한다고 으름장을 놓으니 아무리 망나니 엘프 공주라도 기가 죽을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도끼 전사와 노엘프에 이어 엘프 공주까지 객식구로 들어오며 아저씨의 삶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왕이라는 복선은 안젤린에게 세 번째 동생을 안겨주는데...(이 부분은 4권 리뷰에서 다시 언급해보겠습니다.)

 

맺으며, 제목 때문에 가벼운 이야기가 아닐까 오해를 사기에 딱 좋은 작품이 아닐까 하는데요. 말씀드리지만 절대 가볍지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리어스같이 무거운 게 아니고 이야기 구성이 알차다는 뜻인데요. 우선 작가의 필력이 좋아서 사물에 대한 표현력이 우수하고, 등장인물들 개개인의 개성을 잘 표현하고 있죠. 안젤린의 아버지 사랑이라던지, 이번에 샤를로테의 진심 어린 참회는 가슴을 먹먹하게도 합니다. 벡의 꼬인 성격은 괴롭히고 싶어 하는 누나의 심정이 이런 건가 하는 느낌을 들게 하죠.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처럼 샤를로테를 동생처럼 귀여워해 주는 안젤린의 풀어진 미소는 훈훈하게도 해주고요. 망나니 엘프 공주의 신랄한 말솜씨는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여담이지만 이번 에피소드 테마는 마왕보다는 귀여움이 아닐까 했군요. 샤를로테라든지... '미토'라든지...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이야기를 교차 시키는 작가의 능력입니다. 아버지 시점과 딸의 시점을 따로 진행 시키면서 점차 이야기가 맞물려가고 하나의 가능성에 도달 시키는 능력이 대단히 좋아요. 이것 때문에 눈을 뗄 수가 없었군요. 마왕의 존재를 두고 아버지와 딸의 활약을 따로따로 진행 시키면서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라는 진행 방식은 몰입도를 상당히 올려줍니다. 물론 이야기가 방대해지면서 산만해질 수 있으나 이건 기억력의 문제일 뿐, 아무튼 이전부터 그래왔지만 마왕의 존재가 좀 더 명확해지면서 안젤린의 정체 또한 명확해지는 에피소드였습니다(이거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언급). 그리고 젊었을 적 아버지의 첫사랑은 또 다른 만남을 예약하는 게 아닐까 했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현석장군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099)
라노벨 리뷰 (941)
일반 소설 (5)
만화(코믹) 리뷰&감상 (129)
기타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