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나는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난다 1권 리뷰 -소심하고 나약한 열등종이 살아 남는 법-
장미의 마리아, 재와 환상의 그림갈로 유명한 '주몬지 아오' 작가의 또 다른 작품입니다. 이세계 전생을 다루고 있고, 재와 환상의 그림갈에서 작가 특유의 찌끄레기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일행)의 이야기가 성공을 거두자 이 작품에도 기용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말은 그냥 자기만족만이 존재하는 이세계 치트물에 식상한 분들이라면 권하고 싶을 정도로 작품 내 캐릭터 취급이 좋지가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재와 환상의 그림갈처럼 이 작품 또한 캐릭터들을 한계까지 시궁창에서 굴리는 게 특징이라 할 수 있죠. 거기에 주변 인물에 대한 과감 없는 리타이어는 때론 충격에 빠트리기도 하고요. 여느 이세계물과 다르게 주몬지 작가의 이세계물은 암울하고 어딘가 잿빛투성이로서 읽고 있으면 덩달아 같이 음울해지는 묘한 매력을 안고 있죠.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의 주인공이 하는 일은 죽는 것입니다. 29살 SE(시스템 엔지니어)로서 사축의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은 어느 날 횡단보도를 건너던 아이를 구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죠. 오늘도 트럭이 열 일하나 했는데, 트럭 다음으로 많이 이세계로 보내는 스포츠카에 치여 죽는 불운이란. 그나마 똥차가 아닌 것만 해도 어디겠습니까만 은. 그리고 눈을 뜬 곳은 예상대로 이세계, 신(神)을 통해 치트를 부여받고 이제부터 무쌍을 찍는 인생이라든지, 방대한 현대의 지식으로 우매한 이세계인들을 구원한다든지, 그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었으면 동정인 채로 비명횡사한 일은 억울하지는 않았겠죠. 작가가 재와 환상의 그림갈을 집필 중인 주몬지 아오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마을 사람 A도 못된 상황을 살아간다는 소리죠.
자, 지금부터 주인공은 4번의 환생을 거칩니다. 아니 29살 동정까지 합치면 5번인가요. 그때마다 주인공 앞에 어떤 인물이 나타나죠. 에버라스티아 제국의 황녀 '린제리카', 통칭 해체 공주, 그녀는 주인공이 18살 될 때마다 나타나요. 그리고 가차 없이 열등종이라며 베어버리죠. 그 어떤 종족으로 태어나도 반드시 나타나면서 뭔가의 끈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낳죠. 하지만 아쉽게도, 견우와 직녀처럼 애타는 사랑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주인공은 죽임 당하는 쪽, 해체 공주는 죽이는 쪽. 이유를 물을 사이도 없이 댕강댕강 썰려나가니 주인공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죠. 그런 윤회 사이에 주인공은 있을 장소와 좋아하는 사람을 잃어 가야만 했습니다. 여느 이세계 치트물처럼 먼치킨이라는 능력이라도 있으면 해체 공주와 맞서기라도 할 텐데 그런 건 일절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5번째 윤회를 마치고 18살이 된 어느 날, 여전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몸뚱이로 용병 일을 하던 주인공 앞에 어떤 소녀가 찾아오면서 그는 해체 공주에 대한 반격의 서막을 올리게 되죠. 그러나 그 과정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마왕의 숨겨둔 자식이라는, 윤회를 거치며 어쩌다 왕의 서자라는 포지션을 운 좋게 차지하게 되었지만 졸지에 정략결혼이라는 도구가 되어 머나먼 타국으로 데릴사위로 떠나야 되는 그냥 바람 부는 대로 날려갈 뿐인 낙엽처럼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못 쓰는 아주 지독한 삶을 살아가야만 하죠. 하지만 그는 만납니다. 비로써 5번의 환생을 거치고 총합 119년이라는 인생을 살아오며 반드시 지켜야 될 여자를 만나죠. 첫 번째 생에서 그토록 지키고 싶었건만 지킬 수 없었던 미샤와는 다르게, 이번엔 반드시...
주인공이 맞서야 될 적, 해체 공주가 속한 나라, 에버라스티아 제국은 대군을 이끌고 동부 대륙을 집어삼키기 위해 출정합니다. 파죽지세로 쳐들어오는 제국군을 맞아 손쓸 사이도 없이 동부 대륙은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주인공은 좋아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종이 같은 몸뚱이를 이끌고 전장으로 향하죠. 충분한 전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인공이 먼치킨인 것도 아닌 상황에서 주인공이 내려야 할 결단은 무엇일까. 무엇을 내치고, 무엇을 끌어안아야만 할까. 모두를 지킬 수 없다면 이용할 수밖에 없는, 비정한 모습으로 그는 악인을 자처하며 제국과 처절히 맞서 갑니다. 4번의 인생(29살 동정 빼고) 모두 개입하여 18살을 넘기지 못하게 했던 해체 공주와 에버라스티아 제국, 흡사 개미와 코끼리의 대결에서 주인공에게 승산은 있을 것인가.
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려 합니다. 다만 앞으로는 해체 공주라는 복선과, 주인공이 윤회하는 이유 등에 집중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없잖아 있었지만요. 그리고 주인공은 119년이라는 슈퍼 동정을 뗄 수 있을까. 또한 허접 종이 몸뚱이로 제국의 대군을 맞아, 해체 공주라는 시련을 맞아, 이번에야말로 19세를 넘어설 수 있을까. 그리고 그가 노력할수록, 사람의 가치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가치란 용맹함에서 찾는 것이 아닌 얼마나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을 감수하는지, 찌끄레기 주인공이 좋아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면서 주변인들이 차츰 모이는, 사람의 가치,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맺으며, 역시 주몬지 아오답다 할 정도로 필력이 좋습니다. 작가의 특유의 잿빛투성이 음울함은 여전히 혀를 내두르게 하는데요. 거기에 박차를 가하듯, 전쟁포로에 대한 처우 같은 시리어스한 장면들도 꽤 적나라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특히 주인공의 가족 되는 사람들의 종말은 꽤나 안타깝게 하죠. 그렇기에 더욱 주인공을 몰아넣음으로써 흥미도를 높이는 재주가 있다고 할까요. 어쨌건 의문을 의문으로 자문자답하듯하는 비굴한 진행방식이라든지 제국군이 쳐들어오면서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 등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군요. 아무튼 내용적으로 언급해보자면, 기승전결이 꽤 좋습니다. 하나를 놓고 고민하며 질질 끄는 것이 아닌, 가령 제국의 침공을 과감 없이 보여주고, 주인공이 각 나라를 돌며 협력을 요청하는 장면 장면들에서도 시간을 빼앗지 않습니다. 어쭙잖은 러브라인을 삭제하고(작가의 전매특허), 대신에 올곧은 사랑과 시선을 주인공과 히로인(여러명 나오지만 여기선 정략결혼 당사자)에만 집중 시킴으로서 질척거림이 없다는 게 뭣보다 좋았군요. 다만 등장인물이 많아서 각각의 개성을 살리는데 실패한 느낌도 없잖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