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후궁의 까마귀 1권 리뷰 -동양판 마녀-
장르: 중국풍 시대극,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는 여성향 로맨스, 마녀가 솥단지에 물 끓이는 판타지, 혼백을 저승으로 돌려보내는 심령술, 무엇이든 찾아 드립니다. 심부름센터.
표지: 작중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근데 속 일러스트는 한 장도 없다. 서비스가 안 좋다. 검은 옷이 이 작품의 히로인 '오비, 수설', '오비'중 '오'는 까마귀 '오'자인 듯, 비는 우리가 아는 궁궐의 그 비가 맞다. 수설은 그녀의 이름이다. 그리고 황제 '고준', 이런 작품이 다 그렇듯 고준은 후궁이 수천 명이 있을 텐데도 오비 수설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뒤돌아서서 수설을 쳐다보는 눈빛을 보라.
스토리: 후궁에는 비 신분이면서 왕과 동침하지 않는 오비(烏妃)가 있다. 오비라는 직책을 맡은 자는 예부터 주살과 주술을 부리고 물건 찾기에 도가 텄다고 한다. 한마디로 오비를 서양식으로 표현하면 마녀쯤 되겠다. 어느 날 황제 '고준'이 무언갈 의뢰하기 위해 오비 수설을 찾아온다. 이 인연이 앞으로 어떤 파장을 불러올까 지금은 몰랐겠지. 운명이라는 기류에 몸을 맡겨 그저 떠내려갈 뿐인 자와 그 운명을 거스르려는 자의 싸움이 시작된다.
포인트: 권력에 환장한 사람 때문에 여럿 죽는다. 그래서 원혼이 구천에 떠돈다. 이 원혼을 달래서 저승으로 돌려보내는 게 오비 수설의 일이다. 로맨스 부분에서는 수설이 기거하는 궁에 뻔질라 게 드나드는 고준이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눈물겹다.
특징: 언제나 먹을 것에 낚이는 수설이 귀엽다.
스포일러 주의, 장문 주의
그녀는 거만하다. 황제에게 반말은 기본이다. 이 녀석, 저 녀석이라고 매도하는 건 기본이고 급기야 멍청한 놈이라고 욕까지 한다. 비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나올 말이 아니다. 불경죄로 목이 달아나도 몇 개는 달아났을 터이나 황제는 그녀를 어쩌지 못한다. 여기엔 그녀를 어여삐 여겨서도 아니고 책 잡혀서도 아니다. 예부터 그래왔다. 그녀는 여신 '오련낭랑'을 모시는 무녀라는 설이 있다. '오련낭랑'은 우리로 치면 '단군' 정도의 위치에 있다. 나라의 시조 같은 사람을 모시는 무녀를 함부로 못할 수는 있으나, 수설의 진짜 무서움은 주살(呪殺)에 있다. 요컨대 주술로 사람을 죽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인데 이건 과장된 것이다. 그녀의 옷과 머리가 검은색 일색인데다 사는 곳조차 검은색 일색이어서 그렇게 와전된 것뿐이다. 다만 주술을 부리는 건 진짜다. 그래서 다들 꺼린다.
아무튼 이야기는 수설이 황제 고준의 부탁을 받는 데부터 시작한다. 이런류의 작품이 다 그렇듯, 시작은 사소해도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커다란 권력이 뒤에서 움직이고, 그것으로 인해 스러저간 원혼이 있다. 억울한 죽음이나 미련이 남은 혼은 구천을 떠돈다. 수설의 임무는 이런 원혼을 달래서 저승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안타까운 이별이 항상 존재한다. 가령 황제 고준이 의뢰했던 일은 그(고준)가 아직 황제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다정히 대해줬던 어떤 비의 최후가 담겨 있다. 이런 이야기가 몇 개 들어가 있다. 어쩔 수가 없다. 궁궐이라는 권력 집합소엔 항상 음모가 도사리고 희생자가 생기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서자의 최후도 있다. 엄마가 천하다고 해서 자식까지 천대할 바엔 그냥 세속에 놔주던지 같은 안타까움이 있다.
그리고 시작되는 고준의 집착.
고준은 수설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뭔가를 보게 된다. 이게 이작품의 첫 번째 포인트이자 둘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작용한다.
구체적인 건 스포일러라 아쉽지만 설명은 생략한다.
처음엔 야연궁(수설이 기거하는 곳)에서 하녀 한 명만 대리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그녀가 가여웠으리라. 그녀의 평판은 사람을 주살 시킨다는 소문이 더해져 최악이다. 그래서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 황제 측근조차 망설일 지경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나. 그런 점에서 고준은 수설이 가여웠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주고자 고준은 야연궁에 뻔질라 게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그녀에게 연심을 품기 시작한다. 사실 비에게 있어서 황제가 찾아온다는 건 대단한 승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수설은 '꺼져'라고 말한다. 필자가 약간 각색은 하였으나 고준을 거부하는 그녀의 말을 풀이해보자면 그 말이 그 말이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아버린 고준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급기야 먹을 것을 들고 와 그녀를 현혹하는데 수설은 홀랑 넘어가버린다.
수설은 입만 열었다 하면 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하지만 고준은 맨날 온다. 당연히 다른 비들의 시기와 질투가 폭발 직전으로 치닫지만, 그녀를 상대할 비는 없다. 괜히 알짱 거렸다가 주살이라도 당하면 본전도 못 찾는다. 여기서 아쉬웠던 건 작가가 이런 흥미진진한 부분을 그냥 흘려 버렸다는 것이다. 한 줄로 요약해버리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버린다.
오비의 정체
이게 이 작품의 두 번째 포인트다. 보통 비들은 황제가 바뀌면 다 물갈이 되는 반면에 오비는 황제가 바뀌어도 쫓겨나지 않는다. 오비는 세습제다. 수설은 일단 두 번째 오비로 나온다. 그래서 그녀 아니 오비의 정체가 무얼까 하는 흥미를 돋운다. 오비의 역사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술을 쓰는 오비의 능력을 탐하기 위해 황제 대대로 오비가 되는 여자들을 후궁에 가뒀다는 설도 있다. 고준도 선조의 뜻에 따르는 형식이고, 피의 축제를 벌였던 선선대 황제(고준의 할아버지)도 오비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불길하다고 매도 당하는 오비는 사실 신선시 되고 있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래서 수설이 황제에게 욕지거리를 해도 무사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고준의 외로로 시작한 만남은 오비의 정체로 넘어간다. 원혼을 달래면서 그녀가 왜 야연궁에서 하녀 하나만을 대리고 혼자 살았는가 하는 이유를 풀어간다. 오비와 황제의 역사는 단군의 쑥과 마늘과 비슷하다. 다만 둘중 누가 쑥이고 마늘인지는 모른다. 그냥 빗대어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설의 진짜 정체로 넘어오면서 이야기는 견우와 직녀만큼이나 애절하게 한다. 여기서 고준의 마음은 진짜였다는 걸 수설이 알아가는 게 흥미 포인트다. 선선대 황제(고준의 할애비)가 저질렀던 피의 축제는 둘의 관계를 떨어트려 놓는다. 고준은 그걸 안타까워한다. 어떻게 하면 그녀가 야연궁에서 벗어나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오비의 진짜 정체가 드러난다. 황제 대대로 오비만큼은 건드리지 못한 이유가 드러난다. 수설은 이 나라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게 드러난다.
거부한다. 내 마음속에 파고드는걸.
수설은 혼자 있고 싶어서 혼자 있는 게 아니다. 이게 이 작품의 세 번째 포인트다. 오비는 나라의 진짜 역사를 알고 있다. 이것은 양날의 검이다. 함부로 유출되어선 안 된다. 그래서 오비는 대대로 혼자 살아왔다. 그런 것이 고준이 찾아오고, '구구'라는 시녀와 '소홍교'라는 하녀를 들이면서 그녀의 인간관계는 넓어진다. 그럴수록 오비의 비밀과 그녀(수설)의 진짜 정체가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긴다. 수설은 오비라는 임무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더해 자신의 진짜 정체가 들통날까 매일을 가슴 졸이며 살아왔다. 사실은 오비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을 모른 채 주변은 자꾸만 그녀의 영역을 침범한다. 끝내 그녀는 폭발해버린다. 고준이 해줄 수 있는 건 무얼까 하는 물음을 던진다. 그는 그녀를 돕기 위해 최선의 길을 찾는다.
맺으며: 약사의 혼잣말을 꽤 흥미롭게 봤던 필자로서는 이 작품도 꽤 흥미로웠군요. 둘이 유사한 점이 꽤 있습니다. 남자가 황제(약사는 황제 동생이지만)라는 것, 히로인이 남자에게 흥미가 없다는 것(그렇다고 레즈라는 소리는 아님), 정신 상태가 사차원이라는 것(괴짜), 타인으로부터 홀대받는다는 것, 그리고 사건이 일어나고 해결하면서 가까워진다는 것, 약사는 약초에 낚이고 수설은 먹는 것에 낚인다는 비슷한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몰입도는 좋았습니다.
약사의 마오마오가 그랬듯이 이 작품의 수설도 황제에게 조금식 마음을 열어가는 게 인상적이죠. 사실은 끌리는데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오비라는 임무 때문에 타인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은 안타깝게 하고요. 하지만 이 모든 걸 끌어안을 수 있어야만 진정한 사랑을 쟁취할 수 있다는 교훈을 던지면서 수설의 마음을 사로잡아가는 고준의 노력 또한 눈여겨볼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