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책벌레의 하극상 4부 7권 리뷰 -집념이 불러온 절망-
매우 매우 강한 스포일러 주의
책에 너무 정신이 팔려버린 나머지 '마인'은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쭈욱 그래왔다. 결국 영주의 양녀가 된 원인도 책에서 비롯된다(그렇지 않으면 가족이 죽는다). 이 작품은 현실 세계의 문물을 이세계에 너무 많이 도입하면 주인공이 어떻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실 여느 이세계물처럼 치트 능력도 동반되어 내 스스로 지키는 능력이라도 있으면 도망을 가거나 주변을 지킬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이 그런 이세계물과 차별을 두는 게 이런 부분이다. 주인공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한다. 좀 더 세분화해서 그녀를 평가하자면, 힘(마력)은 있다. 그런데 체력은 없다(곧잘 쓰러진다). 물품을 만들 지혜는 있어도 남을 속일만한 지력이 없다. 책이나 소재를 던져주면 지옥을 마다하지 않는 집념을 보인다(모르는 사람이 사탕 주면 따라갈 타입이다). 그녀는 책에 살고 책에 죽는다. 그래서 주변은 항상 그녀에게 휘둘려 위험에 노출된다.
이 세계는 동화 같은 세계가 아니다. 영주의 자리를 놓고 형제 남매끼리도 치고받고 싸운다. 파벌은 부모와도 원수지간으로 만든다. 아버지가 같은 이복형제는 말할 것도 없다. 독살이 횡행하고 같은 나라에 속해도 이웃 영지를 서슴없이 침공해서 약탈을 한다. 귀족은 평민을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는다. 아이는 세례를 받기 전엔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병으로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다. 왕권을 둘러싸고 정변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버렸다. 권모술수가 판치고 남을 끌어내리기 위해 혈안이 된 곳이 이 세계다. 그런 세계에서 황금알을 낳는 마인의 가치는 말해 무얼 하겠나. 작품 초반(1부) 지식이 없다곤 해도 자신의 행위(책 만드는 것)로 인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전생에서 20살이나 먹은 성인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 건만, 결국 벌로 친부모와 친언니와 생이별하는 꼴을 당하게 된다(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이쯤 되면 자신의 행위에 신중해질 법도 한데 말이다.
작가가 참 외골수랄까. 주변을 초토화 시키면서도 책을 위해서라면 지옥도 마다하지 않는 마인의 성격을 계속해서 그대로 밀고 간다. 어떻게 보면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리지 않고 초심 그대로 밀고 가는 뚝심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뚝심이 이번 4부 7권에서 정점을 이룬다고 하겠다. 마인은 제3왕자를 모셔다 놓고 다과회 중 왕자가 왕궁의 도서실에 갈 수도 있다는 말에 실신을 해버린다. 너무 기뻐서 까무러친 것이다. 사실 마인은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체력이 없다. 흥분하면 체력이 따라가지 못해 정신을 잃어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책이라면 부모가 죽건 말건 상관없는 애에게 도서관의 정점인 왕궁 도서관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기쁘지 않겠는가. 근데 문제는 이게 아니다. 정말 심각한 건 왕자 앞에서 까무러쳤다는 것이다.
눈앞에서 갑자기 사람이 실신해서 쓰러지는 걸 상상해보라. 그게 트라우마가 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지. 에렌페스트(마인 영지)보다 상위 영지의 영애까지 대려다 놓고, 왕자와 영애의 시종들과 호위 기사들이 바글바글한 곳에서 애가 실신을 했다. 마인 덕분에 중위 영지는 되었다지만 여전히 하위 영지 취급 당하는 에렌페스트로서는 멸망의 기로에 선거나 다름없다. 그렇게 친부모와 헤어지게 된 원인이 책에 있음에도 이젠 영지까지 박살 낼 기세다. 이 사건을 들은 그녀의 양부모와 후견인 페르디난드는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싶은 게 이 작품의 백미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지까지 박살 나게 생겼는데 '마인'은 자신이 뭔 짓을 했는지 모른다는 거다. 초 파워 당당이다. 내가 왜 꾸중을 들어야 되는지 이해를 못한다. 이보다 철면피는 없을 것이다. 더더욱 문제는 마인 멋대로 제3 왕자를 자기 부하로 만들어버렸다는 거다(참고로 왕자는 마인보다 어림). 하늘이 노래진다는 건 이런 거다.
사실 이런 부분에서도 리얼리티가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 카스트 제도가 없는 이전 생에서의 몸에 밴 습관대로 이 세계에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뿐으로 태어날 때부터 교육을 받아온 귀족들과 다르게 환생 후 평민으로서의 자아가 성립된 시기에 귀족이 된 데다 이전생의 기억까지 가지고 있으니 바로 귀족과 같은 행동을 보이라는 거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원래는 감히 말도 못 붙이는 상위 영지의 영애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첫째, 둘째, 셋째 왕자하고도 친구 먹자고 덤비니 보호자들의 위가 구멍 나지 않은 게 이상한 거다. 권력 다툼이 일상화되어 있고, 왕권을 둘러싼 대립도 리얼하게 그려대는 이 작품에서 마인의 행동은 자//살 폭탄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본인은 전혀 이해하지도 자각하지도 못하고 그걸 지적하면 왜?라는 의문만 표할 뿐이다.
그런 와중에 '왕이 될 상'이라는 폭탄 위에 원자폭탄이 얹혀진다. 이야기는 결국 파국으로 치달아 간다. 책에 미쳐서 가리지 않고 읽어대다 성전이라는 책에서 너는 '왕이 될 상인가?'라는 물음을 마인에게 던진다. 지금의 왕족에게 있어서 역모나 다름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온 것이다. 보호자인 페르디난드는 현실을 도피해버린다. 아무리 막강한 그래도 이건 좀...이라는 인상이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 그런 와중에 타이밍 좋게도 지금의 현왕에게 정통성을 묻는 일이 벌어진다. 정통성이란 마인이 아까 읽었던 성전이 던졌던 물음을 말한다. 거기에 대답해야만 왕이 될 자격을 얻는다. 이 물음은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다. 왕은 이걸 찾고 있다. 이 의미가 뭔지.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귀족원(학교)의 연례행사에 참여한 왕족을 노리고 테러가 일어난다.
맺으며: 잔머리는 늘어서 책 읽을 핑계를 만드는 게 보통이 아니다. 마인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양어버지(영주)를 감시하라고 해놨더니 그 양아버지의 사탕발림에 홀랑 넘어가 책 읽으러 갔다가 페르디난드에게 꾸중 듣는 게 여간 웃긴 게 아니다. 일만 저지르는 마인을 단속하느라 자꾸만 다크서클이 늘어나는 페르디난드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들의 만담식 말싸움을 보고 있으면 둘이 아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페르디난드가 꾸중을 하면 마인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하며 대들고 그러다 또 혼나고. 그러면서도 페르디난드는 마인을 챙겨주는 모습은 또 흐뭇하게 다가온다. 이번 왕족을 노린 테러가 일어났을 때 마인을 지키는 페르디난드는 멋있다고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큼 늠름한 모습을 보인다. 일러스트도 한몫해서 유부녀(작중)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해주기 충분했다. 일러스트 말 나와서인데 필지가 이때까지 본 여타 작품 포함 일러스트 중 제일 멋이었다.
이번 4부 7권은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집념이 불러온 절망이라고 하겠다. 이 절망은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온다. 마인은 자신의 울타리로 들어온 사람이라면 설령 적이라도 보호해준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모두를 지키다 보니 이번 왕족을 노린 테러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너의 주위는 어째 희생자가 없다?'라고. 이 말은 즉 테러에 관련된? 결국은 책에 미처 앞뒤 분간 못하고, 책 때문에 친부모와 생이별한 원인이 책에 있음에도 버리지 못했고, 친부모와 헤어진 트라우마로 인해 사람들을 지키려는 행동이 되려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는 거다. 그녀만이 아닌 영지 에렌페스트 전부가 휘말릴지도 모를 파란이 예고되었다고 할까. 남은 건 절망이라는 열매뿐... 그건 그렇고 복선을 정말로 많이 깔아댄다. 발매 텀을 보면 기억도 못하는 거 왜 자꾸 깔아대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