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스파이 교실 1권 리뷰 -기믹-
현대전에 있어서 전쟁을 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정보'를 손에 쥐는 것이다.
이 작품은 픽션이다.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그래서 10대 여자애들을 스파이로 교육해 다른 나라에 잠입 시키는 것이 허용된다. 간혹 영화라든가 애니메이션에서 보여주는 스파이는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하지만 현실은 죽어도 없는 사람 취급받거나 영웅으로 추앙받지도 못할뿐더러 사람들에게 기억되지도 못한다. 불가능한 미션을 부여받아 사지로 떠나고, 그렇게 해마다 죽는 요원이 현실에서도 생긴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런 스파이전을 다루고 있다. 비록 10대 여자애들을 동원해 서브컬처로서의 흥미 위주로 그려가고 있지만 목숨이 걸린 일이라는 것은 픽션이나 현실이나 똑같다는 설정이다.
근데 사실 이 작품은 스파이라는 첩보물이라기 보다 이능력 배틀에 더 가깝다고 해야겠다. 이세계 전생 치트와 무능력 치트를 결합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고 할까. 우선 이 작품의 히로인이자 주인공인 '릴리'는 스파이 양성 기관에서 낙오자다. 머리도 좋고 인물도 훤한데 어째서인지 실기에선 괴멸적인 평가를 얻어 아슬아슬하게 쫓겨나지 않을 정도로 숨이 붙어 있다. 그리고 그녀는 독 면역이라는 '특이 체질'이다. 아마 이것 덕분에 쫓겨나지 않은 듯한데, 요점은 이미 시작부터 그녀에겐 '어드벤티지'가 있었던 샘이다. 이렇게 이 작품은 요소요소에 기믹을 숨겨둔다. 등장인물들을 능력이 없는 것처럼 꾸며놓고 실상은 능력자라는 거다.
어느날 릴리는 어떤 임무를 부여받는다. 양성 기관에서 퇴출되다시피 임시 졸업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 [등불]이라는 급조된 팀에 배속되는데, 이 팀은 불가능한 미션을 클리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팀이다. 그녀가 이곳에 도착하니 '6명'의 소녀가 이미 와 있다. 앞으로 릴리는 이 소녀들과 한 달 뒤 사망률 90%에 달하는 불가능 미션에 도전해야만 한다. 팀의 보스는 '클라우스', 클라우스의 지도를 받아 정예 스파이들도 이루지 못한 미션을 클리어해야 하는데 알고 봤더니 여기에 모인 릴리를 포함 '7명' 모두가 낙오자들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그녀들은 버림말로서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그런 처지다.
이런 낙오자 애들을 한 달 만에 교육해 불가능 미션에 도전 하라니 미친 거냐고 소리 질러도 이상하지 않다. 더욱이 그녀들을 교육해야 될 클라우스에게 지도력은 없다. 여러분은 밥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드는 행동을 말로 설명할 수 있나? 하는 질문을 던진다. 행동이 아니라 원리를 설명하라고 하면 과연 몇이나 답할 수 있을까. 클라우스는 원리를 설명하지 못한다. 고로 그에겐 스파이로서 이렇게 하면 된다는 행동은 가르쳐도 원리는 가르치지 못한다. 즉, 이 [등불]이라는 팀은 전부 낙오자만 모인 집단이다. 릴리는 이런 팀에서 도망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클라우스를 납치해서 팀을 해체하라며 협박하는 등 애가 정신 나간 모습을 보인다.
이런 점이 흥미요소다. 스파이로서 능력을 보이며 적을 농락하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게 아닌 현실적으로 불안해하는 인간 심리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릴리는 죽는 것보다 사는 쫓을 택한다. 능력을 펼치기도 전에 죽어버리면 뭔 소용이냐며 아득바득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도망갈 구멍은 없다. 클라우스를 협박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떻게든 실력을 키워 한 달 뒤 찾아오는 클리어 불가능 미션에 도전해 성공 시키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클라우스의 지도 방법을 바꿔 어떻게든 실력을 쌓아야만 한다. 그래서 클라우스는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정신으로 7명의 소녀들을 교육하기로 하는데.
여기까지 오면 뭐 정말로 영화처럼 어떻게든 실력을 키워서 비장한 각오로 적지에 뛰어들어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반전을 이뤄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7명의 소녀들도 클라우스의 교육을 받으며 실력을 키워가긴 간다. 이렇게 이 작품은 사망률 90% 미션이라는 요소에 중점을 맞추며 진행이 된다. 하지만 초반에도 언급했듯이 이 작품엔 기믹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다. 사실 픽션이라고 해도 한 달 만에 낙오자들을 교육한다고 손오공이 초사이언 되듯 될 리는 없다. 손오공은 순간이동 하나 배우는데 1년이 걸렸다고 하더라. 그렇게 한 달간 교육 끝에 7명의 소녀와 클라우스는 적지에 잠입하게 된다.
스파이를 하려면 모두를 속여라라는 말이 있다. 영화배우 아놀드 슈워제네거 영화에서 가족들을 속이기도 했잖은가. 이런 점이 기믹이라는 것이다. 실력이 되지 않으면 기교를 부릴 수밖에 없고 적이 이 기교에 속아주길 바랄 수밖에 없다. 이미 시작부터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기믹에 빠져들게끔 설정이 잡혀 있다. 클라우스와 7명의 소녀들은 기교를 부린다. 그녀들이 왜 불가능 미션에서 도망가지 않고 도전하게 되었는지 조금식 풀어간다. 졸지에 추리물이 되고 괜찮은 흐름을 보여주긴 한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작가는 독자들을 속이려 든다. 사망률 90%라는 요소를 넣어 적국은 상당히 강할 거라는 이미지를 심어준다.
그래서 그 사망률 90%라는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왜 이리 허망한지 필자 자신도 모르겠다. 반전이라면 반전이겠지. 적지에 도착한 클라우스와 7명의 소녀들을 맞이한 건 사망률 90%라는 진실이다. 사실 필자는 중반까진 제법 괜찮은 흐름이라고 봤다. 하지만 적지에 침투하고 사망률 90%라는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뭐 이딴 게 있나 싶었다. 스포일러라서 자세히 언급은 힘들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임무가 힘들어서 사망률 90%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클라우스와 7명의 소녀들은 처음부터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격언을 그대로 실천했다는 전형적인 능력자 클리셰를 보여준다. 결론은 연극이었고, 독자는 연극에 놀아난 꼴이다.
정말 한숨이 제대로 나왔다. 죽음을 각고하고 임무에 종사하는 엘리트 스파이들을 우롱하듯 자기중심적 성격을 보여주는 릴리부터 답이 없다. 쌀 배달하는 사람도, 택시 운전하는 사람도, 비행기 조종하는 사람도 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일에 매진한다. 하물며 스파이라는 위험천만한 일을 하면서 죽기 싫다는 어리광은 어떻게 받아줘야 할까. 포부라도 당차면 모르겠는데 그저 나라를 구하고 싶다는 두리뭉실한 이상을 보여줄 뿐이다. 자신이 개화하지 못한 건 양성 기관과 교관이 실력이 없다는 마인드. 여기에 쇄기로 능력이 없다면서 독 면역이라는 특이 체질과 독 만들기는 수준급에 엘리트 못지않은 움직임은 어떻게 봐줘야 할까. 이런 릴리가 낙오자라면 엘리트는 대체 어떤 능력을 보이는가.
필자는 위에서 이 작품은 이능력 배틀물이라고 언급했다.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무술을 하며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듯이 이 작품도 그에 못지않은, 대체 눈에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라는 건 대체 뭘까 싶다. 와이어 액션신은 이세계 전생물처럼 이능력이 없다면 표현 불가능한 영역 수준이다. 어떤 소녀는 [불행]이라는 체질로 주변의 불행을 끌어들이는 모습을 보이는데 우연이 아니라 미래 예측하듯 이능력을 보여준다. 이쯤 되면 스파이물이 아니라 이능력 배틀에 가깝다. 낙오자라면서 능력은 있는, 이세계 전생에서 흔히 보는 무능력자가 치트를 써서 능력자가 되는 그런 요소가 잔뜩 있다. 요컨대 이 작품은 스파이를 가장한 이세계 먼치킨이다.
맺으며: 온통 기믹 밖에 없다. 릴리를 낙오자들만 모인 [등불]이라는 팀에 합류를 지시하는 시점부터 이미 기믹이 시작된다. 스파이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찾는다면 이 작품은 대성공이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라는 격언도 성공적이다. 적은 결국 속아 넘어갔으니까. 하지만 이능력을 넣기 시작하고 사망률 90%라는 진실이 드러나면서 분위기는 고꾸라진다. 이러려고 애들을 교육한 것인가. 이쯤 되면 왜 낙오자들로 이 미션에 도전하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결론은 엘리트들을 쓸 필요도 없었다. 엔딩을 접하면 작중에 언급되는 소녀들의 성장 '가능성'의 의미는 이걸 두고 하는 말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은 낙오자들의 갱생 프로그램이라랄까. 스파이로서 전통적인 첩보물을 바라고 이 작품을 찾는다면 분명 맞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배틀물로서 성장물로서 찾는다면 어느 정도 맞을 것이다. 현실을 대입하고 읽었던 필자는 괴리감에 몇 번이고 책을 덮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