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노벨 리뷰

[스포주의] 모험가 자격을 박탈당한 아저씨지만, 사랑하는 딸이 생겨서 느긋이 인생을 즐긴다 3권 리뷰

현석장군 2021. 3. 31. 21:19



입양 딸 라비를 맡길 곳을 찾아 쫓겨나듯 도망치듯 떠난 도시에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아저씨는 뜻밖의 상황과 마주한다. 언제는 모험가 자격이 되지 않는다며 비아냥 일색이었던 사람들이 그를 영웅으로서 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 쇠약해져 오늘내일하는데도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구명줄마저 잘라버린 인간들이 손바닥 뒤집듯 아저씨는 환영하고 있다. 아마 1권에서 드래곤인가 뭔가 쓰러트려서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임팩트 깊은 인상이 남아 있지 않는 거 보면 드래곤 퇴치가 결정적이었지 않나 싶다. 천둥 벼락으로 엘프 마을이 불타는 걸 진화해주기도 하고, 쫓겨난 뒤 뭔가 선행을 많이 한 거 같다. 근데 그동안 용사 파티와 같이 다니면서 선행은 하지 않은 건가. 아저씨가 37살이 될 동안 용사 파티원 중 한 명으로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해왔을 텐데 이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고작 드래곤 퇴치와 선행 좀 했다고 갑자기 영웅 취급? 이렇듯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자기들 편한 데로 해석해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번 이야기는 도시로 돌아온 아저씨가 그동안 용사와 매듭짓지 못했던 일들을 해결하고, 딸 라비에게 모든 걸 쏟는 걸 그리고 있다. 아저씨는 용사 파티에서 쫓겨나고 라비 덕분에 알게 된 자신이 저주받은 이유가 뭘까 늘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덕분에 도시에서 쫓겨나고 멀지 않은 미래에 HP(생명력)가 소진되어 객사할 운명이었다. 근데 마침 저주받아 펜릴로 변해 있었던 라비를 구해주면서 비로소 자신도 저주받았다는 사실, 그 저주를 건 장본인이 용사라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면 용사에게 있어서 아저씨는 스승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저주를 받으면 복수해주는 게 순리건만 아저씨는 그런 건 바라지 않는다. 이렇듯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저씨의 성품은 보통 착한 게 아니다. 그저 아들과도 같았던 용사를 만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고 이유나 들어보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용사를 찾던 중 누군가에 의해 라비가 납치되는 일이 벌어진다. 라비를 거둬들일 때부터 이미 딸바보가 되어 있었던 아저씨다. 역린을 건드린다는 게 무엇인지 보여줄 차례다.

근데 납치범에게서 뜻하지 않게 용사의 상태를 듣게 된다. 보통 저주란 되돌려지면 그 파괴력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아저씨는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풀었다. 그리고 그 저주는 시행자에게 되돌아갔다. 보통 이러면 쌤통이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는 죽으라고 자신에게 저주를 걸었던 용사의 상태를 걱정하게 된다. 사실 이런 부분이 여간 찌증이 아니다. 목숨이 달려있는 악행을 당하고도 분해하지 않는 성격을 어떻게 봐줘야 하는가. 딸 라비의 교육상 어른들의 지저분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고 딸 또한 선량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라며 애써 선한 마음을 포장하는 모습은 위선으로 다가올 뿐이다. 이렇듯 이 작품은 읽는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줄 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 라비를 납치하고, 다시 아저씨로 하여금 저주를 받으라며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똘똘 뭉친 납치범마저 용서해주는 모습에서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할 정도였다. 죽어가는 용사를 병원에 입원시키는 장면에서는 이 정도면 착한 마음이 아니라 그저 호구에 병sin같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이렇게 용사와의 관계는 일단락되긴 하는데 여전히 용사가 아저씨에게 저주를 건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기승전결까지 무시하게 되면서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아무튼 라비가 납치되면서 머물던 여관이 박살 나버려 책임감을 느끼고 자기가 수리비를 내겠단다. 보통 이런 장면에서는 시한폭탄 같은 아저씨를 내쫓는 게 순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저씨가 이 도시로 돌아올 마음을 먹은 이유가 도시 모든 사람이 아저씨를 깔보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중 한 사람이 여관 주인이었고, 이렇게 상처 입히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상처를 치유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걸 역설하기도 한다. 제법 긴 시간을 들여 여관 재건에 돌입하고, 아저씨는 라비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좋은 것만 보여주고, 상처 입히는 사람도 있다면 그 상처를 치료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아가게 해준다. 문제는 너무 딸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 모든 게 라비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거다. 어떻게 보면 흐뭇하고 사랑스럽다고도 할 수 있는데 사실 지리멸렬하고 따분할 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이 무엇보다 와닿는다. 더 이상 모험가의 길은 걷지 않게 되고 그저 품에 들어온 딸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받치는,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라비를 통해 세상을 달리 보게 되고 그렇게 해서 모험가로써가 아닌 인간으로서 아저씨는 성장을 해간다. 라비는 그런 아저씨의 가르침으로 세상의 옳고 그름을 배워가는 그런 이야기다. 아무튼 이런 생활 속에서 무지렁이 같은 아저씨의 성품이 짜증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교훈을 던지기도 한다. 마치 다리가 부러진 제비를 치료해준 흥부처럼 선행을 베풀면 반드시 좋은 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부서진 여관을 재건하면서 빠듯한 예산 때문에 고심이 많던 아저씨에게 엘프들이 내미는 손은 박 씨를 물어다 준 제비와 같다. 이렇듯 교훈적인 이야기가 상당히 들어가 있다. 그래서 카타르시스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바란다면 이 작품은 맞지 않을 것이다. 또한 폭력엔 폭력으로 맞서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면 그 죄가 돌아온다는 메시지도 들어 있다. 

맺으며, 그냥 육아 프로그램이다. 아저씨가 라비를 키우기 위해 뭣이 중한디를 실천해가는 그런 이야기다. 그렇게 선한 마음으로 똘똘 뭉친 아저씨의 가르침을 받고 라비는 성장을 한다. 호기심이 많아 이거저거 물어보고 새로운 것에 신기해하고 사물의 원리를 알아간다. 얼핏 귀엽고 아기자기한 장면들이 연상될 테지만 사실 그런 거 없다. 작가의 필력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다. 복선을 제대로 살리지도 못하고, 접하게 되는 일들엔 감정적(부정적인 삼정은 아님)이 되는 일이 많다. 주변이나 자연에 대한 사물 표현에 있어서 1차원적이다. 분명 판타지이고 중세 시대를 표방하고 있건만 은행이니 병원이니 현대적 언어 등을 보자면 어휘력에서도 좀 빈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할까. 그리고 중심을 라비에 너무 치중하다 보니 애 숨통을 조이는 듯한, 딸바보는 사실 아이의 자주성에 제약을 걸게 되고 그걸 보는 입장에서는 답답한 느낌을 들게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느낌으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