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전생했더니 검이었습니다. 9권 리뷰 -급발진 하다가 급브레이크-
결말에 가까운 스포일러 주의, 긴 글 주의
멍청한 조상 덕분에 후손이 고생하는 전형적인 예다. 좀 사이좋게 지내면 어디가 덧나는지 인간은 인간대로, 수인족은 수인족대로 서로가 우월하다고 지껄이게 되면 필연적으로 싸움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눈과 귀를 막고 주변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으니 꼰대 소리나 듣는 것이다. 그래도 서로 으르렁거리는 게 안타까워 사이좋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이번 9권에서는 인간과 수인족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가교 역할을 하려 했던 어떤 흑묘족 왕녀의 기구한 삶이 드러난다. 근데 사실 사서 고생이다. 어차피 눈과 귀를 다 막은 꼰대들에게는 뭘 말해도 통하지 않는다. 말을 해서 바뀐다면 세상살이가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왕녀가 간과한 건 어른들을 너무 물로 봤다는 것이고, 장밋빛 그림을 그린 머릿속 꽃밭이 문제였던 거다. 그래서 그런가 작가는 포인트를 엄한 곳으로 돌린다.
프란은 자신의 진화에 계기를 준 '키아라'를 찾아 수인국으로 넘어온다. 키아라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화를 프란이 이뤘다는 것에서 흑묘족의 미래를 보게 된다. 장장 500년이나 청묘족에 의해 탄압을 받아왔던 흑묘족에게 있어서 프란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사실 신(神)은 흑묘족을 벌하면서 진화의 조건을 내놓았긴 한데 세월이 흐르면서 소실이 되어버렸다. 그 조건이라는 게 매우 단순함에도, 이세계의 신(神)은 그렇게 야박하지 않다. 그렇다고 친절하지도 않지만. 키아라는 이번 이야기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운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다. 프란에게 있어서 키아라는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다. 부모가 객사하고, 노예로 붙잡혀 마물의 먹이로 전락할뻔했던 프란이 스승을 만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이별을 하면서 조금식 마음의 성장을 이뤘다곤 해도 아직은 12살 어린 애다.
하지만 응석 부릴 시간은 없다. 500년 전 망령이 자신의 어리숙함을 망각한 채 모든 수인족들을 말살하겠다고 마물을 이끌고 대규모 침공을 하기 때문이다. 이번 이야기는 청묘족을 피해 간신히 터를 잡아 숨어살던 흑묘족 마을이 위기에 빠지게 되고, 그 흑묘족 마을을 지키기 위해 프란이 나선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둘도 없는 친구를 만난다. 프란이 성장하면서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었지만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프란으로서는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친구라고 불러주는 '메아'라는 소녀가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흑묘족 마을을 위협하는 마물 무리에 맞서 친구와 싸워가는 프란, 여느 이세계물이면 우정 파워로 쉽사리 정리하겠지만 이 작품은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을 험하게 굴리기로 이 작품만큼 심한 게 있을까 싶다.
아무튼 마물떼를 물리치면서 500년 전 흑묘족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실이 드러난다. 어쭙잖은 생각으로 인간과 수인족간 가교를 놓으려 했던 흑묘족 왕녀가 죽은 지 500년 만에 부활해서 자기 후손들을 말살하겠다고 한다. 어차피 인간과 수인족이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건만, 자신의 생각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뿔이 제대로 난 왕녀가 되시겠다. 그러다 인간 남자와 눈이 맞아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순애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왕녀가 남자 보는 눈도 없다. 결국 차였고, 집안에서는 인간 남자를 끌어들였다고 극딜을 놓는다. 이처럼 불쌍한 왕녀도 없을 것이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래서 손댄 게 사신(死神)이다. 신(神)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사신이라고 없을 리 없다. 사신의 힘을 손에 넣어 뭐 좀 어떻게 해보려고 하니까 이번엔 아빠가 그녀를 사신에게 받쳐 버린다.
보다 힘을!! 외치던 흑묘족들이 사신의 힘에 손대자 분노한 착한 신(神)에 의해 신벌이 내려졌고 그렇게 흑묘족은 몰락했습니다.
방아쇠는 왕녀가 당긴 것이지만 이유 있는 방아쇠라 할 수 있다. 사실 꽉 막힌 흑묘족 일족들에게 화가 났긴 할 것이다. 남친은 도망가 버렸지, 거기다 다른 여자랑 애까지 낳았으니 꼭지가 안 돈다면 이상한 것이다. 그래서 왕녀는 힘을 얻기 위해 사신에게 힘 좀 받았는데 그게 또 탐난다고 아빠가 딸내미를 사신에게 받쳐버렸다. 결과는 착한 신의 분노였고, 흑묘족은 탄압받게 된다. 즉, 선조(왕녀 및 왕족들)의 잘못을 후손이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뭐 청묘족의 음해가 끼여 있다곤 해도 신벌을 받은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걸 납득하느냐는 별개다. 그래서 500년 후 누군가에 의해 소환된 왕녀는 잘 되었다는 듯이 사신의 힘으로 중무장하고 수인국을 유린하려 든다. 알고 보면 자신이 미숙해서 욕먹어 놓고, 자신을 욕했다고 죽이겠단다.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작가는 포인트를 엄한 곳으로 돌린다.
신파극을 원했나. 악당으로 가고자 했다면 철저히 악당으로 갔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것이 기승전결이라는 것이고 깔끔한 진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왜, 피도 이어지지 않은 어린애를 출연 시켜서 왕녀가 이러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면죄부를 주는지 모르겠다. 프란의 고생과 나아가 흑묘족이 전원 노예로 추락할 정도로 많은 탄압과 괄시를 받게 한 원흉이 왕녀다. 꽉 막힌 흑묘족 위정자들도 한몫했다고는 해도 방아쇠를 당긴 건 왕녀다. 500년 후 이 땅에 다시 재림한 왕녀는 프란이 흑묘족 마을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장소에 나타나 압도적인 힘으로 프란 일행을 유린하게 된다. 일러스트는 쓸데없이 고퀄이다. 흑묘족을 향한 왕녀의 증오는 매우 크다. 그렇게 비춰진다. 늘 그랬듯, 프란은 이번에도 궁지에 몰려간다. 여느 이세계물처럼 주인공빨은 없다. 이 작품은 주인공을 험하게 굴리기로 유명하다.
아무튼 이번 이야기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을 꼽으라면 '키아라'라는 존재다. 평생을 종족의 비원인 진화의 단서를 찾아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수인국에 붙잡혀 노예로 전락하고 고생을 많이 하게 된다. 그녀는 프란을 처음 만날 때부터 친손녀로 생각하고 있다. 자신이 못했던 일을 프란이 해주었다. 그래서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오늘 내일 하던 노인이 벌떡 일어나 자신도 진화를 외치며 마지막 불꽃을 피우듯, 만약 키아라가 노예로 잡히지 않고 수인국에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살아오면서 프란의 성인 버전으로서 활약을 했을 것이다. 프란의 평행세계에 있는 인물이라고 하면 그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왕녀와의 싸움은 녹록지가 않다. 증오로만 살아갔고, 죽어서도 증오에 얽매어 있는 왕녀다. 그런 왕녀를 맞이해 프란을 살릴 수 있는 일은 무얼까. 키아라는 뒤늦게 핀 꽃이다. 작가가 분위기를 다 말아 먹어서 그렇지 마지막 불꽃을 피우는 키아라의 모습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프란은 또 한번 정신적 성장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넓은 의미로 보면 프란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해야 되나 싶은 게 필자의 본심이다. 뭔 말이냐면, 기승전결을 8권부터 내다 버리는 만행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해치울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도 무슨 드래곤 볼의 셀도 아니고 적(에너미)은 걸핏하면 잘린 신체가 회복되고 그러다 보니 싸움이 지리멸렬해진다. 왕녀를 잘 구슬리면 우리 편으로 넘어올 것도 같은데 그렇게 분위기 잡아놓고 왜 또 싸움질인데 싶은 어이없는 부분도 있다. 사실 왕녀가 흑묘족은 물론이고 수인국을 멸망 시키겠다고는 했지만 피해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왕녀가 개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작가도 그렇게 표현을 했고. 그런데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입 싸악 닦고 '너 죽을래?'라며 처음으로 돌아가 또 싸움질하는 건 뭔데 싶다.
맺으며: 용두사미가 따로 없다. 왕녀라는 최악의 적을 맞이해서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정작 그 왕녀의 최후는 작가가 독자들과 어지간히도 싸우고 싶은가 보다 싶을 정도로 어이가 없다. 또한 위의 신파극을 언급한 부분으로 돌아가서 왕녀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는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한다는 거다. 이건 스포일러라 자세히 언급은 힘든데(10권 리뷰에서 언급 가능할 듯) 철저히 악당으로 설정 해놓았다면 그렇게 흘러가던가. 왕녀 자신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 좀처럼 이해도 감정 이입도 되지 않는다. 작가는 정말로 이게 먹힐 거라 생각한 것일까. 분명 기승전결을 낼 수 있었음에도 질질 끌다가 엄한 사람을 사망케해서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싸구려 각본은 최악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