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리빌드 월드 1권 下 리뷰 -개천에서 용은 되었는데, 이러다 이무기 될 판-
이 작품은 세계가 멸망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슬럼가 꼬맹이가 구시대 내비게이터를 만나 개천에서 용이 나듯 성공가도를 달리는 이야기다.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던 구시대는 어느 시점에서 멸망해버렸고, 잔존 인류는 구시대 문명의 산물들, 이젠 유물이 되어버린 그것들을 모아들여 다시 옛 영광을 되찾으려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도시를 방어하던 각종 병기들은 자신을 제어하던 주인들이 멸망으로 사라지자 도시로 접근하는 살아남은 인간들을 사냥하는 몬스터로 돌변하게 되고, 멸망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헌터(판타지로 치면 모험가)가 되어 살고자 목숨을 걸고 몬스터(병기, 이하 기계)들과 싸우며 구시대 문명의 유물을 찾으러 혈안이 되어 간다. 요컨대 먹고살려면 유물들을 주워와 도시를 통치하고 옛 문명을 재생하려는 기업에 팔아라 뭐 그런 이야기다.
주인공 '아키라'도 헌터 중 한 사람이다. 슬럼가에서 자라 거리의 쓰레기를 주워 먹는 세월을 거치고 성장한 그는 제대로 먹고살기 위해 유물을 주워와 팔려고 옛 도시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마치 고블린에 당하는 초보 모험가처럼 주인공도 도시 방어 기계에 들켜 죽을 위기에 빠지게 되고, 거기서 구시대 내비게이터 '알파'를 만난다. 주인공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을 들라면 알파를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총 한 자루에 총알 몇 개로 시작한 튜토리얼은 주인공에게 죽을뻔했다는 각인을 심어주며 세상은 녹록지 않다는 교훈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럴까 '알파'의 수상쩍은 의뢰를 덥석 물어서 그녀(알파는 여성형이다)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게 되고, 그녀(알파)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으며, 그녀의 의중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게 이 작품의 포인트가 된다.
주인공은 그녀의 안내 덕분에 옛 도시에서 원활하게 유물을 모으게 되어 뒷골목 귀퉁이가 그의 서식지였던 것에서 온수가 나오는 호텔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으니, 알파를 더더욱 믿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녀 덕분에 실력도 나름 키워가고 평생을 벌어도 못 벌 돈도 이제 거뜬하게 벌어들인다. 그럴수록 꼭두각시 인형처럼 알파의 의도대로 움직여가는 주인공이다. 의문은 조금식 품고 있지만 그럴 때마다 알파는 기가 막히게 캐치해서 얼버무리면서 주인공을 컨트롤해 가는 게 예사롭지 않다. 알파는 무엇을 시키려고 개천에서 노니는 송사리 같은 주인공을 용으로 만드는 수고를 들일까. 이게 이 작품의 핵심 같은데, 결국 뭐 구시대를 멸망으로 이끈 존재가 그녀(알파)고, 옛사람들에 의해 봉인되었는데 주인공 보고 해제 해달라 뭐 그런 시추에이션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리뷰가 뭐 이리 허술해 하겠는데, 사실 저런 건 아무래도 좋다. 필자가 바랐던 건 에이티식스(86)이라는 작품처럼 기계와의 전쟁에서 인류의 존망을 걸고 이게 절망이라는 장면들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이름이기도 한, 리빌드 월드를 사전적으로 풀이하면 재건하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기계와의 싸움이 주가 아닌 멸망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삶을 재건해간다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래서 옛 도시로 가서 유물을 주우며 기계들과 싸우는 장면은 서브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2권부터는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겠으나, 1권(상,하)에서 기계들과의 싸움보다 슬럼가에서 나름대로 질서와 법도가 있다는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이런 장면들에서 옛 시대보다는 못하나 이들 나름대로 고도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등 작품 제목답게 재건에 힘쓰는 모습들을 보여준다는 거다.
그래서 이런 소재가 재미있나? 참으로 미묘할 수밖에 없다. 소재로서는 충분하나 작가가 그걸 살리지 못한다고 할까. 기계들과의 전투는 밋밋하기 짝이 없다. 에이티식스처럼 충격을 주는 소재를 가미했다면 어땠을까 싶은데, 가령 기계들의 몸체로 쓰인 소재가 무엇인지 말이다. 그런 건 없고 그냥 공장 양산품처럼 만들어져 습관적이고 기계답게 시키는 일만 하는 것처럼 인간들을 습격하는 일에만 치중할 뿐이다. 이런 멍청한 기계들을 상대로 인간들은 막 죽어 나간다. 그리고 이번에 어이없었던 건 주인공이 몬스터 기계 전차가 쏜 포탄을 발로 차올려 되돌려 주는 장면이다. 작가는 포탄의 속도와 그에 따른 질량은 알고 있나 모르겠다(필자도 잘 모르니 태클 걸지 말자). 아무리 알파의 서포트를 받았고, 강화복을 입어서 힘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지만 실소를 금할 길 없었다.
어쨌거나 이 작품도 어쩔 수 없는 히로인들의 난립을 막을 수 없나 보다. 옛 도시에서 구해준 여성 헌터 '사라'와 '엘레나', 돈 좀 만지고 있는 주인공을 습격하려던 조직의 '셰릴', 무기 상점의 주인 '시즈카'등 어째서 주인공이 되자마자 이렇게 히로인들이 들러붙는지 참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냥 관계도 아니고 속옷이라던지 신체 특정 부위라든지를 부각 시키고 셰릴의 경우 아예 모든 걸 다 줄게요라는 듯 드러눕는다. 주인공에게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는 모습들이라던지, 특히 셰릴의 경우 주인공에 의해 조직의 우두머리들이 죽어버리자 조직을 이어받아 살아가기 위해 억척같은 모습은 짠하기 보다 귀기가 서린 무섭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인다. 몬스터 기계와의 전투나 알파의 주인공 컨트롤 보다 셰릴의 광기가 무척이나 인상 깊은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위의 이야기 연장선이긴 한데, 몬스터 기계와의 싸움보다는 인간관계에서 특이한 모습을 보이는 작품이다.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 되어 오로지 주인공의 눈치만 살피는 셰릴은 이 작품에서 단연 독보적이다. 주인공의 심기를 거스르는 거라면 자신의 조직원도 가차 없이 내쫓아버리는 등 주인공 비위를 맞추기 위해 처절한 모습을 보이는데, 사람이 이렇게 타락할 수 있구나를 느끼게 해주지만 한편으로는 여자의 몸으로 슬럼가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직을 이끌기 위해 주인공이라는 뒷배가 무엇보다 필요했던 그녀로서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처절함이 배어 있어서 나쁘게만은 평가하지 못하는 캐릭터다. 허풍은 있는 대로 치면서도 무서워 다리를 벌벌 떠는, 겉으로는 곧은 심지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연약함의 표본으로서 주인공에게 기대려 하지만 주인공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 더욱 악착같이 변해가고 한다고 했는데 돌아오는 건 없고 그래서 힘이 들어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마음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는 장면에서는 결국 그녀도 한 명의 인간이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한다. 주인공이 옛 도시에서 구해준 여성 헌터 '사라'와 '엘레나'와의 관계도 독특하지만 셰릴과의 관계는 보다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마지못해 등을 토닥여주는 주인공의 상냥함에 기운을 차리고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은 여타 작품들의 히로인들보다 강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받았다. 하지만 히로인들과의 만남 등에서 성적인 부분이라든지 아포칼립스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상황은 옥에 티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성(性)적인 부분은 필요도 없는데 부각 시켜서 분위기를 갉아먹게 하는 건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히로인들의 집착성 행동도 그렇고 주인공 띄워주기가 매우 심한 편이랄까.
그래도 자기가 정한 테두리를 지키려는 주인공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인연을 맺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자는 그게 누가 되었든 처 부수려고 한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에서 한편으로는 학대받은 아이가 자기 자식을 끔찍이 보살피려는 모습과도 상통하기도 한다. 주인공에게 가족은 없다. 하지만 관심이 없는 사람은 철저히 외면한다. 셰릴이 이웃 적대 세력에게 위협을 당하는데도 귀찮아한다던지, 하지만 적극적으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그녀를 내치지 못하고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주인공의 상냥함 등. 세기말적인 분위기 보다 이런 인간관계가 독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경우에 따라 주인공을 띄워주는 그런 경향도 있다. 가령 1회성 양아치를 등장시켜 주인공에게 희생 당하게 해서 주인공을 부각 시킨다던지.
맺으며: 쓸데없는 설명이 너무 많다. 마치 필자의 리뷰처럼 작가가 간추릴 능력이 없는지 하나의 소재를 놓고 다방면으로 설명을 하는데 학을 떼게 한다. 470여 페이지 중 이런 설명을 간추렸다면 300여 페이지로 끝낼 수 있었지 않나 싶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작가가 성(性)적인 이야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사라와 엘레나의 에피소드에선 매번 빠지지 않고 나온다. 무기점 시즈카의 가슴을 주인공 얼굴로 문대는 건 왜 하는지 모르겠고. 알파는 수시로 알몸이 되기도 하고, 적나라한 수영복을 입어 주인공 눈앞을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목욕신은 꼭 필요했나? 셰릴 하고는 아예 19금 만들 기세다. 가끔 보면 내용적으로 이렇게 성적인 이야기로 분량을 잡아먹는데, 능력이 안 되나? 게다가 사라와 엘레나가 자신들을 구해준 주인공에게 감사 인사한답시고 집착하는 부분은 다른 의미로 광기 그 자체다. 마치 주인공에게 대답을 듣지 못하면 인생 다 살은 것처럼 절망에 빠질 거야라는 분위기는 대체... 2권부터는 생각 좀 해보고 구입하던지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