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책벌레의 하극상 4부 9권 리뷰 -노력하면 할수록 잃어버리는 아이러니-
중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좋아하나? 안 좋아하나. 이 작품도 사실 요점을 찾으라면 신데렐라처럼 신분 차이를 뛰어넘어 맺어질까. 안 될까를 들 수가 있습니다. 히로인이자 주인공인 '마인'은 평민 출신의 여자애고, 상대역으로 나오는 '페르디난드'는 귀족이죠. 마인은 귀족들의 전유물인 마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노려지고 납치당할뻔한 걸 페르디난드가 보호하게 되면서 둘의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이세계 전생물로서 '마인'은 지구에서 책에 깔려 죽어 이세계로 넘어온 케이스인데요. 그녀는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이세계에 신문물을 퍼트리면서 개혁을 주도하고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지만 그게 또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생각하지 않다 보니 그녀의 보호자가 된 페르디난드는 하루라도 위장에 빵꾸나지 않는 날이 없게 되죠. 하지만 이것도 곧 끝이 납니다.
책에 환장해서 책만 보이면 앞뒤 가리지 않고 돌격해대고, 평민 시절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몸이 허약해서 걸핏하면 픽픽 쓰러지는 통에 그걸 수습해야 하는 페르디난드의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4부 완결편이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이번 9권에서는 매일 양쪽 관자를 주먹 돌림 당해도 반성은 그때뿐인 그녀의 고삐를 이제 누가 잡아줘야 될까 하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왕명으로 '에렌스바흐'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게 확정되어 버린 '페르디난드'와 또다시 가족(페르디난드)을 잃어야만 하는 마인의 이야기를 그리는데요. 아쉬웠던 게 이 부분이군요. 벌써 몇 년이나 같이 생활했으면서 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순 없었을까. 그동안 서로가 호감의 '호'자도 보여주지 않다 보니 이별을 그저 담담하게 그려낼 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마인은 책 이외엔 관심이 없고, 페르디난드는 마법 연구 이외엔 관심이 없거든요. 게다가 마인은 '빌프리트'라는 영주의 아들과 약혼한 몸이기도 하고, 페르디난드는 빌프리트의 삼촌이니 자칫 콩가루 삼각관계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죠. 필자 개인적으로는 콩가루가 되어도 좋으니 이 부분을 좀 부각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 사실 페르디난드가 마인을 챙겨주는 모습은, 주위에서 보면 마인이 바람피우는 꼴이거든요. 근데 그걸 제일 앞에 서서 지적해야 될 약혼자인 빌프리트는 와이프(마인)가 그러거나 말거나이고 주위에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보니 그냥 흘러갈 뿐이죠. 애초에 마인은 지아비가 될 빌프리트는 안중에도 없는 게 원인이기도 합니다만. 이렇게 다소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게 이 작품 특유의 매력이자 흥미 포인트가 아닐까 싶은데요.
이번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마인과 영주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던 어느 귀족 아줌마의 복수극으로 일으킨 '마인'의 암살 미수 사건과 '페르디닌드'가 아렌스바흐로 떠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아기자기 한 라노벨 특유의 이야기가 아닌 좀 더 묵직한, 중세 시대나 우리의 조선시대처럼 계급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실적인 픽션을 주제로 하는 게 특징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쉽게 죽어 나가는 등 다소 시리어스 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죠. 그 과정에서 연좌제를 물어 일가족이 모두 사형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파벌 전쟁에서 진 쪽의 귀족은 몰살, 아이들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는 다소 비참한 모습도 보여줍니다. 그러니 마인을 죽이려 했던 암살 미수 사건도 개그성이 아닌 진지하기 짝이 없는 시리어스를 동반하고 있죠.
두 번째로 '페르디난드'가 왜 아렌스바흐에 데릴사위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지도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 부분도 참 현실적이라는 걸 보여주는데요. 중세 시대나 우리의 조선시대를 봐도 왕좌를 놓고 가족끼리도 치고받고 싸우는 게 비일비재 했잖아요. 그걸 이 작품에 빗댄다면, 동생이 죽도록 미운 누나가 동생의 영지를 박살 내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결과 중 하나가 페르디난드 빼돌리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이런 복선은 꾸준히 심어져 왔고, 페르디난드가 아렌스바흐로 가면서 복선이 회수되는 양상이랄까요. 참고로 페르디난드는 에렌페스트의 주요 전력이라서 그가 빠지면 전력 약화로 에렌페스트는 위험해지고 누나는 그걸 노리고 있죠. 이렇게 박진감까지는 아니지만 꽤나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는데요.
여기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에렌페스트 최대 전력이 일부러 적지에 간다는 의미, 그 근원, 그러니까 페르디난드의 가슴에 무엇이 있을까가 이번 9권의 핵심입니다. 아직까진 둘(마인과 페르디난드)은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은 듯하지만 가족으로서 살뜰하게 챙겨주는 서로의 모습에서 머지않은 미래에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복선으로는 충분한 이야기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에렌페스트를 지켜달라는 페르디난드의 부탁과 그에 호응하는 마인의 모습은 잔잔한 여운을 남기죠. 하지만 아직은 이쪽 방면 눈치가 거의 없어서 서로가 고생을 더 하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 장면들입니다.
맺으며: 여기에서는 단점이자 필자의 개인적인 해석을 좀 써보겠습니다. 이 작품을 우리나라로 비유하자면, '한식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한글을 반포하라.' 이세계 주민들에게 듣도 보도 못한 현대의 음식을 소개하고, 까막눈 사람들에게 책을 팔아 눈을 뜨게 하는, 일명 이세계 문화 침략 같은 이런 내용이 여전히 들어가 있어서 거부감이 살짝 듭니다. 이런 걸 하지 않아도 다른 이야기로 충분히 분량 뽑아낼 실력이 있음에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요. 사실 이런 부분, 이세계에서 신문물 전파하는 걸 왜 하는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해석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픽션인데 너무 진지하게 나가는 거 아니냐는 말들이 있어서 자중할 뿐이군요. 지식 쪽도 알고 보면 이세계인은 멍청하다의 계보를 잊는 작품이랄까요.
아무튼 책에 집착하는 마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작가의 노력이라고 해야 할지, 자기(마인)가 암살 당할뻔했는데도 그보다 책에 집착하고, 마인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고아원 회색 신관 4명이 행방불명 되었는데 그보다 책, 솔직히 이 정도면 분위기 깬다고 할까요. 페르디난드가 아렌스바흐에 가게 된 원인도 알고 보면 마인 때문이고, 종합적으로 보면 마인이 암살되었다면 에렌페스트는 평화로워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랄까요. 이젠 캐릭터를 좀 자중 시킬 필요가 있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필자가 나이가 들어 이상보다는 현실적이 되다 보니 냉정해지게 되는군요. 사실 라노벨이라는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알고 보는 것이고, 그런 내용이 라노벨의 참맛이겠죠. 싫으면 안 보면 되는데 그게 또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