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고블린 슬레이어 2권 리뷰
스포일러가 좀 강하게 들어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이번 무대는 물의 도시입니다. 10년 전 마신인지 마신 왕인지를 쓰러트리고 영웅이 된 검의 처녀(1)의 부름을 받고 갔더니 도시 지하에 살고 있는 고블린 좀 퇴치 해달랍니다. 마신 왕을 쓰러트린 영웅이자 지고신(神)을 모시는 대주교에다 모험가 등급 2위인 금 등급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어째서 고블린 슬레이어에게 이런 일을 부탁하는 것일까. 시작부터 위화감이 감돕니다. 참고로 고블린 슬레이어는 은 등급(3위)입니다.
그러나 일단 고블린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지옥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고블린 슬레이어는 당연히 일을 받아들이고요. 1권에서 파티가 된 여신관을 필두로 엘프녀(표지 모델), 드워프, 리자드 맨을 대동하고 고블린 퇴치에 나섭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철저히 준비하고 깔보지 않는 마음으로 지하 수로에 내려갔건만... 거기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사선이었습니다. 언제나 깔보지 않는 고블린 슬레이어였지만 이번만큼은 위험에 빠지게 되는데요.
잘 통솔된 움직임과 배를 만들 정도의 지식을 보여주는 고블린 무리들, 거기에 숫자의 폭력까지 가세하니 배겨낼 제 간이 없습니다. 여신관은 물어 뜯겨서 사경을 헤매고 엘프녀는 능욕 당하기 일보 직전이고, 고블린 슬레이어는 기절을 해버렸습니다. 1권에서도 그랬지만 온라인 게임에서는 한방 거리도 안 되는 고블린이 여기선 이렇게 강한 몹이었나?라는 신선함을 몰고 오는데요. 거기에 세간에서 신참 모험가도 상대할 수 있는 쪼렙 고블린이라는 인식과 현장에서 느끼는 고렙 고블린의 갭은 이 작품의 묘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쨌건 고블린 챔피언(보스)을 맞아 호되게 당하면서도 고블린 슬레이어 파티는 맡은 바 임무를 해나갑니다. 하지만 그동안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슬슬 알아가는 고블린 슬레이어, 자신들은 왜 여기에 와서 이렇게 개고생 해야만 하는가, 지하수로에서 마치 모든 존재를 거부한다는 듯이 나타난 앨리게이터(악어의 한 종류)를 만나면서 고블린 슬레이어는 감춰진 진실에 접근합니다. 자신들은 농락 당했다는 것을...
모든 원흉은 고블린에 있습니다. 신참 모험가 브레이커 고블린, 고렙 모험가라도 한순간만 방심해도 몰락 시킬 수 있는 존재, 지금 진실이라는 혼돈 속에서 검의 처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0년 전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원흉, 울부짖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던 비통함, 구원받길 원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원통함, 그런 부정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끊임없이 정신을 갉아먹혀 피폐해질 대도 피폐해진 검의 처녀는 고블린 슬레이어에게 구원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검의 처녀가 망집에 사로잡혀 상관없는 사람을 사지로 몬 것이 아니라서 더욱 질이 나쁘게 다가옵니다. 검의 처녀는 그저 무서웠습니다. 고블린이, 그리고 마신을 쓰러트린 영웅이자 누구나 우러러보는 금 등급인 모험가가 고블린이 무서워서 쩔쩔매고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습니다. 그녀는 고블린이 무서운 존재라는 걸 알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블린 슬레이어를 불렀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감춘 채...
여자가 이성으로써 끌리는 남성상은 무엇일까, 이 작품은 그런 고찰로 빼곡하게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고블린 퇴치는 서브적인 이야기고 진짜 이야기는 그저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도움을 요청하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사심을 채우지 않고 잡아준다는 것, 그런 작은 상냥함에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그런 상냥함은 접수원 아가씨가, 엘프녀가, 여신관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번엔 검의 처녀도...
이번 2권은 1권도 그랬지만 일명 넷상 용어인 사이다가 별로 없어서 눅눅한 맛을 보여주지만 엘프녀가 감정에 따라 귀를 파닥거리게 귀여워서 개그 부실에 대한 감점을 상쇄하고 있는 게 특징입니다. 근데 사실 이런 작품에 개그가 들어가선 안 되겠죠. 몬스터에 잡혀 능욕당한다는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로 시리어스함을 넘어서는 작품이기에, 하지만 그렇기에 개그로 분위기를 녹여주는 게 좋지 않을까도 싶긴 합니다.
여튼 고블린 슬레이어와 대화할 때 파닥파닥 거리며 그녀가 고블린 슬레이어를 바라보는 감정을 귀로 표현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2천 살이나 먹었으면서 그동안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지 그녀가 고블린 슬레이어를 바라보는 모습은 그야말로 소녀 그 자체군요. 그리고 여신관 또한 몸을 사리지 않으며 고블린 대군을 맞아 죽을 둥 살 둥 장렬하게 싸워 갑니다. 이번엔 더욱 고생이 심했는데 조금은 보답을 받게 되는군요.
맺으며, 약간은 집중해서 읽어야 되겠더군요. 문제는 던지는데 해답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아 고생 좀 했습니다. 필자의 머리가 굳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요. 여튼 모험가 다운 모험을 하자는 엘프녀의 말에 따라 모험을 시작한 고블린 슬레이어가 귀환하며 누군가가 읊조린 동료라는 울림 좋은 단어에 취한 장면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늘 혼자였던 자신에게 언제부터인가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사선에서 서로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가 곁에 있다는 걸 자각하는 부분은 조금 울컥하게 하였군요.
- 1, 이 작품은 사람 이름은 나오지 않고 직업이 이름으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