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백곰 전생 2권 리뷰 -백곰, 두 집 살림 차리다. 하지만 번식기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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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경고 했습니다.
번식기가 아니어서 꿈쩍을 안 한다. 1권에서 백곰 '쿠마키치'가 했던 말입니다. 인간이 아닌 곰이라는 1년에 한번 번식기를 맞는 생물의 몸이다 보니 아무리 인간일 적 마음과 지식과 경험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일단은 야생동물인 곰인 이상 자연의 이치를 따라야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에 나오는 히로인들은 정말 불쌍하다 할 수 있어요. 아무리 마음을 전달해도 목석같은 남편이 안아주지 않고 바늘로는 밤을 지새울 수가 없게 되죠. 라지만 일단은 전연령가니까 그렇고 그런 장면은 나오지 않아요. 루루티나는 16년 동안 부모님 밑에서 교육은 받았다지만 교육이 완성되기 전에 부모님의 품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단편적인 지식과 감정에 휘둘려 남녀 관계에서 조금 일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것에서 좀 씁쓸하게 합니다.
이번 이야기는 루루티나와 사실상 부부의 연을 맺고 그녀의 여동생들과 생활하던 쿠마키치, 어느 날 숲에서 어떤 조그마한 엘프 소녀를 만나게 돼요. '리코타' 올해 8살입니다. 일러스트가 조금 불만인데 일단은 귀엽게 나왔어요. 성격은 발랑까지고 조숙하고 건방짐의 표본으로서 세상의 무서움을 모르고 방방 뛰다가 호된 꼴을 당하게 된 순간 쿠마키치의 도움을 받아 기사회생을 하죠. 그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이렇게 되면 너에게 시집갈 수밖에 없네'라는 리코타의 황당한 말에 이끌려 간 곳엔 소녀의 어머니가 계셨으니, 쿠마키치 왈: 어머님! 안녕하세요? 날아오는 마법, 리코타의 어머니 '로비올라'와의 만남은 참 극적입니다. 리코타의 괴팍하고 잔망스러운 성격은 엄마에게 물려받았을까, 아무리 천하무적 백곰이라지만 쫄지 않을 수 없었어요.
섹슈얼리티가 보강되었습니다. 1권에서 꿈쩍을 안 한다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성숙한 성인 여성과 유부녀라는 조합이 불러오는 숨 막히는 섹슈얼리티, 섹슈얼리티의 뜻이 뭔지 모르면 검색해보세요. 성생활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만 포괄적으로 나아가면 이 뜻이 의미하는 게 많아집니다. 여튼 1권에선 백곰으로 전생한 것을 두고 루루티나를 구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라 여겼지만 리코타의 어머니 로비올라를 만난 백곰은 지금의 자신이 백곰인 게 너무나 저주스러웠을 겁니다. 그녀(로비올라)는 딸을 구해준 백곰에게 호감을 느껴 어프로치를 단행해요. 루루티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성인 여성의 매력, 눈앞이 아찔해지지만 정작 꿈쩍을 안 하는데 뭐 어떡하라는 심정이 절절하게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나무 아미 타불인 상황이 벌어져요.
그런데 왜, 이런 외딴 숲속에 엘프 모녀가 있는 것일까. 아이를 생각해도 로비올라의 나이(20대 초반)를 생각해도 도시에서 살아가는 게 생활적인 면에서 나을 텐데라는 의문이 시작돼요. 곰이라는 짐승이라서 그런지 둔하고 학습이 없는 걸까요. 루루티나의 경우를 보더라도 제2의 루루티나가 나온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세계관이라는 걸 백곰은 망각하고 있어요. 사실 타인의 과거를 캐는 건 상대에게 비수를 꽂는 일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자신이 추측하기 보다 너 님들 왜 여기에 있어요?라고 비수 같은 말을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못된 고자 백곰, 하지만 로비올라는 괜히 어른이 아니라는 것처럼 애둘러 말하며 자신의 과거를 밝히지 않습니다. 백곰은 인간일 때 20대 후반이었는데 나이를 헛 먹은 듯, 리코타의 성화에 못 이겨 집에 돌아가지 못한 백곰은 그녀(모녀)들과 오붓한 소풍을 즐기는데...
언제나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난데없이 초절정 미남 엘프 남자로 구성된 전투부대가 들이닥쳐서 로비올라 모녀를 대려 갈려고 하는 극박한 전개가 펼쳐져요. 그리고 드러나는 로비올라 모녀의 과거, 모녀는 물건 혹은 재물(제물 아님)이었습니다. 과거 중앙아시아에선 형이 죽으면 부인은 동생에게 재물로 귀속된다는 풍습이 있었습니다(보다 정확하게 알고자 하면 검색 해보셈). 형수는 동생과 재혼을 하고, 그 동생도 죽으면 또다시 아래 동생과 재혼하는, 이걸 잘 표현한 게 모리 카오루의 '신부 이야기'인데 기회가 되면 한번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여튼 로비올라 모녀는 그런 과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남편 죽음의 이면에 도사린 추악한 진실, 자신을 노리는 시동생으로부터 도주, 그런데 그녀가 부족의 관습을 깨면서까지 도주한 이유가 무얼까.
재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여자로서, 자신의 길은 자신의 발로서, 그리고 남편의 원수나 다름없는 부족 속에서 자신이 있을 자리 따윈 없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세상 밖으로 도주를 꿈꾸죠. 하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못해 좌절되고 맙니다. 형수에 집착해 여기까지 쫓아온 시동생, 일찍이 결혼하여 세상의 즐거움을 모르고 성인이 된 반동인지(작중엔 표현되어 있이 않음) 단 하루 쿠마치키와의 즐거웠던 생활에서 지금 필요한 건 무엇인지 로비올라는 깨달아 버립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루루티나)와는 다르게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건 좋지 않다는 걸 어른으로서 자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잔망스럽고 발랄한 리코타, 너그러운 모성과 때묻지 않은 순진한 소녀 같은 모습의 로비올라가 흘리는 눈물을 봐버린 쿠마키치는 모녀를 지키기로 결심을 하게 되죠.
백곰은 가족과 도움을 바라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다. 시동생과 그의 부하들 그리고 시동생이 끌고 오거나 자기 멋대로 와버린 엘프족 미치광이 연금술사를 상대로 정말로 목숨을 거는 일전을 펼쳐요. 시동생이나 백곰이나 서로에게 정의는 있습니다. 시동생은 사모하게 된 형수를 되찾기 위해, 백곰은 눈물 흘리며 괴로워하는 사람을 못 본 채 하지 않는다는 결의에 따라. 백곰 이번엔 정말로 위기를 맞아 가요. 하지만 작가는 이딴 건 부차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백곰 힘을 좀 냅니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백곰의 근육과 날카로운 손발톱 앞에선 적수 없으리. 백곰 태어나서 진심으로 싸운다. 등이 까지고 불에 타는 한이 있어도 이 여자만큼은 지킨다. 이렇게까지 자기를 지켜주는데 반하지 않을 여자는 없습니다.
사실 백곰도 로비올라에게 흑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백곰이라도 꿈쩍을 안 하는 데다 본능도 그럴 시기가 아니라는 유전자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는 둔감형 주인공이 되어 버리죠. 늘 틈만 나면 이불 펼려는 히로인들을 말리느라 진땀 빠집니다. 여기에 로비올라도 가세하게 되죠. 이런 부분에서 비단 여자만이 아니고 사회생활하면서 타인의 호감을 얻는다는 건 무엇인가를 고찰하게 합니다. 잇속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도움의 손길, 이 사람이라면 인생을 맡겨도 되지 않을까 하는 든든함,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이라는 말에 넘어가지 않는 목석같은 마음, 그리고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건 그렇고 백곰 번식기가 여름이라고 하니까 언제까지고 목석으로만 있지 않을 거라는 복선이 떴습니다.
맺으며, 더 쓰고 싶지만 글이 길어져서 이만 줄여야 되는 게 안타깝긴 이 작품이 처음이군요. 이번 리뷰는 반도 표현 못했어요. 루루티나의 얀데레 같은 성격과 꼬맹이 세쌍둥이가 펼치는 귀여움은 뇌 속에서 그림으로 그려질 정도로 작가의 필력에 대단했습니다. 이걸 글로 표현할 수 없는 필자의 저질스러운 필력이 이렇게 저주스러울 데가 없었군요. 특히 서열 관련해서 후반부 라로(세쌍둥이중 하나)가 로비올라에게 목걸이를 주는 장면에서는 분명 감동스러운 부분인데도 이제 앞으로 너 님은 내 밑이라는 것 같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초반에 보면 웨어울프는 서열이 깐깐함으로 라로는 제일 밑이니까 목걸이 줄게 하는 부분이 있죠. 백곰에게 구원받아 울고 있는 로비올라에게 목걸이를 건네는 라로, 물론 작가는 다른 뜻으로 이 장면을 연출했겠지만 초반에 그런 장면 넣어놓고 이러니 감동이 웃음으로 바뀌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