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유녀전기 10권 리뷰 -블랙기업에 혹사당하는 유녀-
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의 인구가 약 2천만에서 2500만이 줄어 버렸다죠. 그 피해는 지금도 영향을 끼칠 정도로 인적 소모는 대단했는데요. 독일은 소련과 상호 불가침 조약인지 뭔지를 맺었음에도 괜한 의심병이 도져선, 그들을 믿지 못했던 독일은 광활한 동부전선(소련으로 치면 서부전선)에서 전격전을 시작했고 그들을 맞아 소련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변변한 총도 없이 그냥 병력을 밀어 넣는 수밖에 없었죠. 근데 이 방법은 효과를 봐서 독일을 폐퇴 시키기에 충분하였다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합니다. 네, 지금 타냐가 속한 제국이 딱 그런 상황인데요. 대전 말기 독일 장교를 취재했던 어떤 다큐에서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소련을 상대로 하나의 사단을 없앴더니 몇 개의 사단이 충원 되었다. 그동안 수백 개의 사단을 무찔렀지만 자고 일어나니 그보다 많은 사단이 만들어져 전선으로 오고 있다.
총력전을 펼치는 제국엔 더 이상 인적 자원이 남아 있질 않습니다. 타냐가 제도(수도)에서 본 제국의 상황은 처절함 그 자체였는데요. 그동안 전선에서만 생활하며 간간이 제국의 상황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심각할 줄을 몰랐던, 인적자원도 인적자원이지만 물자 부족은 더욱 심각하여 연방(소련)의 진지에 쳐들어가 그들의 장비를 노획해 그 장비로 연방을 두들기는 장면을 보자면 제국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죠. 사실 총력전을 펼치는 상황에서 적의 장비를 노획해 운용하는 건 그리 우습고 이상한 건 아닙니다. 문제는 뭐냐면 우두머리 즉 정치권과 군 상층부 나아가 통수권을 가진 놈들까지 이 상황에서조차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는 것. 그걸 알게 된 타냐의 기분은 어떨까요. 배가 가라앉고 있는 거죠. 국가라는 화이트 기업이 언제부터인지 블랙 기업이 되어 버렸어요.
인력도 없고, 돈도 없고, 그런데도 승리에 미련 정도가 아니라 확신에 차서 꽃밭을 헤매고 있는 자칭 위정자들을 보고 있자면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군요. 사실 패배는 곧 국가 붕괴라는 현실을 애써 감추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미 얼마 안 남은 머리 좋은 참모장교들은 그 점을 깨닫고 뭔가를 하려고는 하는데 가망이 있을는지요. 그래서 타냐는 이직을 결심하죠. 가라앉는 배에 난간을 붙잡고 있어봐야 같이 수장되는 꼴 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그녀는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를 붙잡는 심정으로 다른 나라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줄 만한 재료를 찾기 시작하죠. 이대로 종전을 맞이했다간 전범으로 처분될 뿐이니, 일단 그동안 자소서에 쓸만한 활약을 해왔다고 자부는 하는데 그래도 뭔가 크게 터트릴만한 게 없나 하고 쏘다니지만 녹록하지가 않군요.
늘그막에 좀 편히 살겠다고 모난 돌이 되어 열심히 분골쇄신했던 것이 지금에 발목을 잡아 댑니다. 상관은 너밖에 믿을 놈 없다며 편지 셔틀을 시키지 않나, 편지 셔틀 하러 갔더니 머리에 꽃 꽂은 포격 소녀(수 중위)가 반겨주질 않나, 완료하고 돌아오니 이번엔 V 로켓(1)이 되어 연합왕국(영국) 좀 두들겨 줘라는 상관의 명령에는 이런 미친놈을 봤나 싶었을 겁니다. 타냐가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은 정말 희귀한 장면이라 할 수 있군요. 그야 고작 대대 병력(48명)으로 적군 본진을 때리라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잘하면 이직에 필요한 적이 알아주는 커리어를 달성할 수도 있지만 애석하게도, 이 장면은 일본의 진주만 습격을 연상케 하는데 결국은 뭐 과거 일본 제국이 저질렀던 짓을 우회로 비꼬는 게 아닐까도 싶었습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배가 가라앉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배도 없고, 카르네아데스 판자가 될만한 것도 없고, 그래서 열심히 물을 퍼내고는 있지만 퍼내는 양보다 들어오는 양이 더 많군요. 대대를 이끌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소방수 역할은 하는데 그때뿐이고, 이놈의 위정자들은 관심병인지 의심병인지가 만연해서 종전보다는 전선 확대를 꾀하는 통에 유능한 병사만 죽어 나갑니다. 이직을 결심했지만 섣불리 나갔다가는 총살 부대가 쫓아올 거 같고, 상관이라는 놈은 불가능을 타진해도 네가 무능해서 그런 거 아님? 하고 자존심을 긁어대니 이거 쏴 죽일 수도 없는 노릇. 무능한 부하보다 부하를 무능으로 모는 상관이 100배는 더 무섭다고 서술해대는군요. 그래도 어쩌겠나요. 까라면 까야 되는 게 군이라는 조직이고, 죽고 싶지 않다면 해내는 수밖에요.
맺으며, 이번 10권의 최대 백미는 한때 타냐의 대척점이라고 인정받았던 수 중위가 머리에 꽃 꼽고 나와 미친 짓을 하는 장면이군요. 이전에도 그랬지만, 피아 식별 따윈 개나 줘버리고 마치 포격 마법 소녀처럼 폭주하는 장면은 하나의 희극이었습니다. 다만 타냐의 활약에선 너무 띄워주는 경향이 있더군요. 적들도 수년간 치러지는 전쟁으로 인해 인적자원이 갈려 나가고 남은 거라곤 겁쟁이들(전쟁은 우수하고 용맹한 사람부터 소진 시킨다죠.)뿐이라지만 대대 병력(타냐의 부대)으로 여단 병력에 뛰어들어 헤집고 다니는 장면은 코미디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미국 어떤 행사에서 유녀전기 코스프레가 금지되었다고 하더군요. 이유야 말해서 무얼 할까 싶습니다만. 사실 이 작품을 비판하고자 하면 양파 껍질처럼 계속 나오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그래도 알고 보면 한쪽으로 치우처진 게 아닌 평형을 유지하려는 모습도 보인다는 게 이 작품의 특징이기도 한데요. 가령 이번에 등장하는 공격도 방어라는 상관의 궤변(일본 전수방위를 재해석, 자칫 우익물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는 대목)을 타냐가 반론한다던지, 승리할 수 있다는 정신론을 펼치는 위정자들에게 반기를 드는 장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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