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노벨 리뷰

[스포주의] 86 - 에이티식스 4권 리뷰 -스포일러가 조금 강하니 주의, 글도 좀 깁니다-

현석장군 2019. 6. 27. 23:08

[레기온]이란 무엇인가. 그동안 리뷰 쓰면서 이것에 대한 설명을 안 했었군요. [레기온]은 지금 신과 그의 동료들이 있는 연방의 전신인 기아데 제국(이하 제국)이 만든 세계 침략 병기입니다. 인간의 개입 없이도 알아서 다 하는 100% 자율 신경(AI)을 탑재 하였죠. 제국은 이걸 바탕으로 해서 마치 자크를 만든 지온이 지구에 선전포고하고 전쟁을 일으킨 것처럼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제국의 수뇌부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시민 군'은 궐기를 일으켜 연방을 세워 버리죠. 그런데 이게 말도 못할 병크였으니, 구 수뇌부에 의해 제국 이외엔 싹 쓸어버리라는 명령만 입력되어 있었던 [레기온]은 그 명령에 충실했고, 당연히 제국이 아니게 된 연방까지도 공격하는 일까지 벌어지죠.

 

사실은 제국도 이런 일이 있을까 제어 책으로 [레기온]의 수명을 2년으로 해뒀습니다. 즉, 2년만 참거나 방어하면 인간들의 승리로 끝이 날 예정이었죠. 하지만 궁하면 해답을 찾아낸다고 괜히 AI를 탑재해서는, 이(빨)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수명을 늘릴 방법을 찾았던 [레기온]은 그 해답을 인간에게서 찾았습니다. 2년이 지나면 죽어버리는 자율 신경을 인간의 그것으로 대체하는 것, 이 작품이 시리어스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뇌를 쉽게 말해서 CPU 대용으로 쓰는, 그 뇌를 가진 인간이 우수하면 할수록 더욱 막강해지는 [레기온]이 탄생하죠. 주인공 '신'은 그런 [레기온]에 쓰인 뇌가 내지르는 비명을 듣는 이능력을 가졌습니다. 1권에서 허를 찔렀던 '엄마'라는 대사는 정말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아닐 수 없어요.

 

아무튼 신은 2년 전 자신들을 걱정해주고 마음 아파해주었고 마지막엔 길을 떠나는 자신들을 배웅해주었던 '레나'와 다시 재회를 하였습니다. 얼마나 꿈에 그리던 순간이었던가, 하지만 어떤 언동으로 인해 현실은 비참했고 '신'에게는 평생 따라다닐 흑역사로 남아 버렸죠. 그래도 2년 전 마음을 주고받았던 사이 아니던가요. 그동안 마음을 키워왔던 것을 여기서 다 풀겠다는 것마냥 고양이가 살갑게 장난치듯 신을 대하는 레나의 몸짓과 마음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훈훈한 장면이 아니었나 싶군요. 공화국은 [레기온]의 대공세를 막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레나는 살아남은 에이티식스들을 규합해 조금 남은 땅을 지키며 버티고 있었죠. 그들이 떠나고 1년하고 6개월 뒤, 연방에 의해 공화국이 탈환되면서 레나는 에이티식스 지휘관으로 연방으로 오게 됩니다.

 

이번 이야기는 레나를 지휘관으로 해서 아직 탈환하지 못한 공화국 일부를 공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단순하게만 흘러가지 않는군요. 우선은 레나가 에이티식스들을 바라보는 시각이라 하겠는데요. 그녀는 자신의 나라 공화국이 에이티식스들에게 저지른 죄에 무척이나 가슴 아파하고 있죠. 마치 일본에 우익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온통 차별주의자 뿐인 자신의 나라에서 그녀만큼은 그들의 인권과 처우에 불합리를 느끼고 있었는데요. 누구보다 그들이 처한 현실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이 안고 있는 상처와 아픔을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런 점에 너무 과몰입해서 차별하는 공화국에 화를 내도 된다면서도 그들을 하얀 돼지라고 부르는 에이티식스들을 보고 공화국과 똑같은 놈이라고 독설을 날린다는 것이군요.

 

부모 세대가, 형과 누나와 언니 세대가, 이유도 없이 전장에 강제로 불려 나가 죽어 버렸고 자신의 세대에조차 전장에 떠밀려 나가 죽어야 되는 불합리와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해주지 않는 현실을 인격이 형성되는 어린 나이 때부터 격은 이들에게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지금도 국토 일부만 남기고 멸망해버린 공화국 잔존 국민들은 지금 자기들이 이 꼬락서니 인건 에이티식스 무능함 때문이고 여전히 인간으로 취급해주지 않으며 연방에 반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변화 없는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에이티식스들이 십수 년이나 받았을 앙금이 해소되지 않은 현실에서 그들(에이티식스)을 바라보는 레나는 그들(공화국)에게 화를 내도 된다면서도 화를 내는 그들을 공화국과 똑같이 취급하는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앙금은 쉽게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슬프다는 레나, 신의 부대에 관제관으로 착임했을 때 보여준 쉽게 생각하는 버릇은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할까요. 남의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헤집고, 그것을 인지 못해 한소리 듣고서야 겨우 그들이 처한 현실을 자각했으면서도 여전히 그들이 안고 있는 진짜 마음과 아픔은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다는 마음과 모순이 발생하고 말아요. 이 점 때문에 공화국에 있을 때 강등 당하고 그랬으면서, 결국 이 모순된 점은 끝에 가서야 풀립니다. 그들, 에이티식스들이 공화국 나아가 인간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알게 되면서 그녀가 얼마나 이상론자였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죠. 그들의 마음은 더 이상 이제 어찌할 수 없는 인간 측 [레기온]이 아닐까 하는, 감정이 깎여 나가버린 아이들...

 

그리고 레나 대항마(연적)로 아네트라는 공화국 기술 사관이 연방으로 찾아오면서 결국은 주인공 신의 적은 [레기온]이 아니라 인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낳아 버립니다. 아네트는 신과 소꿉친구 관계로 공화국이 유색종 차별을 공식화했을 때 그를 배신한 전력이 있습니다. 이후 그녀는 아버지가 하던 실험을 이어받아 수많은 에이티식스들을 기술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생체실험을 하였죠. 신에게 있어서 그녀는 [레기온]과 마찬가지로 적이나 다름없어요. 그런데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게 특기인지 생체 실험을 뻔뻔스럽게 하면서도 나도 괴롭다느니 신에게 미안한 짓을 했다는 둥, 조금 더 일찍 내 손에 들어왔으면 좋은 실험 재료가 되었을 텐데(이건 자조적으로 한 말)라는 둥 하면서도 어릴 적 그에게 했던 짓(배신)을 사과하고 싶다며 생떼를 부릴 땐 뭐 이런 미친X이 다 있나 싶더라고요.

 

아무튼 그런 자기들만 생각하는 인간 군상들에 끼여 신과 그의 동료들은 아무렴 어때하는 기분으로 [레기온] 지배 영역 공략에 나섭니다. 그리고 신종 [레기온]과 진화하는 [레기온]을 만나면서 신과 동료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죠. 갈려 나간다는 건 이런 건가 싶은 게요. 더욱 막강해지는 [레기온]들을 만나 백전노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에이티식스들도 아무런 힘을 못쓰는 상황에서 인간에게 미래는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기 시작하죠. 거기에 자신들을 구하러 와준 에이티식스들을 여전히 배척하고 차별하는 데만 급급한 공화국 사람들에게서 사람의 가치관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메시지도 던지기도 하고요. 그걸 보고 안타까워하는 레나를 보면서 그렇게 뭔가를 해주고 싶다면 보다 위쪽으로 올라가서 발언력을 높인다는 개념은 없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하죠.

 

맺으며, 레나가 감정이입을 너무하고 있습니다. 여느 라노벨 히로인처럼 주인공이 베푸는 조그마한 호의에 무척이나 감동하는 타입이랄까요. 사실 돌이켜보면 2년 전에 랜선으로만 대화를 했을 뿐 얼굴을 본건 1년 6개월 전이 처음이고 그 뒤 연방에 파견되면서 만나게 다죠. 그런데도 과한 감정이입은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감정이입이란, 연애의 그것입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뭣보다 자기의 가치관을 타인에게 주입 시키려는 모습은 조금 지양해야 되지 않을까 싶더군요. 상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면서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으면서 변화를 촉구하는 모습은 좋게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아네트는 멸망한 공화국을 버리고 그래도 어릴 적 소꿉친구였는데 하며 버스 갈아타듯 신에게 기대려 하는 모습은 정말...

마지막으로 위에서 부정적으로 쓰긴 했지만 사실 레나는 에이티식스를 순수하게 걱정하는 마음에 그들이 인간들과 동화 되도록 이거저거 시도를 해본다고 할까요. 하지만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서 두 번이나 신에게 지적을 당했으면서도 의욕만 앞서서 조금은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고 말죠. 사실 전투 신이든 신종 [레기온]이든 딱히 상관없어요. 원래 이런 작품에서 등장하는 적은 진화하기 마련이니까요. 중요한 건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 묘사이고 이 작품은 비교적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마모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에서 이들에게 미래는 과연 올바르게 풀릴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기도 하죠. 결국은 마왕을 무찌른 용사가 어떤 대우를 받나 하는 물음과도 같습니다. 해피엔딩은 있을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