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후궁의 까마귀 3권 리뷰
'수설'은 선대 오비에게 주워졌을 때부터 자신의 숙명을, 운명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평생을 밖으로 나갈 일 없이 궁에 갇혀 오련낭랑을 위로하는 역할에 충실히 하며 그렇게 살다 소리 소문 없이 사그라질 운명이라는걸. 오비는 이 나라가 건국될 때부터의 이면에 있는 역사를 알고 있다. 이 나라가 숭상하는 신(神) 오련낭랑 따위는 여기로 유배되어 온 죄인이라는 것을. 수설은 오련낭랑을 만나러 온 부엉이와의 사투에서 몸을 날린 황제 고준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깃털로 변한 부엉이를 보며 수설이 느낀 감정은 무엇일까. 부엉이는 바다의 거품으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했다. 수설은 자신을 오련낭랑을 가둬놓기 위한 그릇이라고 되뇐다.
외로움은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공허함은 사람의 마음을 좀 먹는다. 나의 존재 의의를 고뇌하는 수설의 마음은 애틋하기 짝이 없다. 이 그릇이 깨어진다면 나는 까마귀의 깃털이 되어 버리는 걸까. 표지에서 수설이 들고 있는 흑진주는 부엉이가 수설과의 싸움 끝에 남긴 것이다. 이번 3권을 읽고 표지를 다시 보니 인생의 덧없음을 이보다 잘 표현한 게 있나 싶다. 오비는 이 모든 게 숙명이나 마찬가지다. 오련낭랑을 품고 혼자 살다 혼자 죽어가는 그런 존재가 오비의 역할이다. 사람들은 오련낭랑을 신으로서 숭상한다. 신이 존재함으로써 전란을 피하고 천하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오비의 마음은 모른 채.
황제 고준이 찾아오고, 시녀를 들이는 등 사람들과 교류가 늘어난 것을 계기로 사건을 해결해 달라는 사람들이 늘었다. 점을 처 달라는 사람도 늘었고, 오비 수설이 거처하는 야명궁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게 되었다. 이로써 수설은 외로움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될 터였다. 시녀 '구구'는 허물없이 수설을 상대로 인형놀이하기 바쁘다. 황제 고준은 먹을 것을 들고 와 그녀에게 내맨다.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먹을 것을 꾸역꾸역 입에 넣는 장면은 마치 햄스터를 연상케 한다. 아쉬운 건 일러스트 하나 없다는 것이고. 황제 고준은 오비가 안고 있는 고뇌를 알고 있다. 왜냐면, 황제는 여름의 왕이고 오비는 겨울의 왕이니까.
이번 이야기는 오련낭랑의 신앙이 쇠퇴하고 새로운 종교가 대두하면서 수설에게 위기가 닥치는 걸 그리고 있다. 나라가 흥망성쇠 하는 것처럼 옛 시대의 종교 또한 흥망성쇠의 기로에서 벗어나진 못하는가 보다. 오련낭랑의 사당은 자꾸만 줄어가고, 숭상하는 사람도 줄어 궁에 모신 사당조차 쇠퇴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앙의 힘은 신도에게서 나온다고 했던가. 오련낭랑의 힘은 예전만 못하다. 그러니까 부엉이에게도 고전했으리라. 그 틈을 비집고 옛 시대의 종교가 다시 부활하면서 수설에게 위협으로 다가온다. 저주를 걸어 수설의 힘을 파악하고, 급기야 목숨을 빼앗기 위해 본격적으로 실력을 행사해오는 적으로 인해 수설은 궁지에 몰려간다.
혼자였다면 진작에 꺾였을 것이다. 지금은 자신을 지탱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외로움을 달래주는, 공허함을 잊게 해주는, 그중에 황제 고준은 벗인 그녀를 구원해주려고 한다. 한낱 비에 지나지 않는 그녀를 구해주려는 이유는 뭘까. 하지만 오비의 몸에서 오련낭랑을 빼낸다는 건 나라의 안녕이 끝난다는 것과 같다. 수설은 자신의 몸에서 오련낭랑을 빼낸다는 건 죽음을 의미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길이 있다면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다.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건 아무리 오비로서의 숙명이자 운명이라도...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특징은 등장인물 간 서로가 엮여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알지 못하는 인물이라도 한 다리 건너 인연(혹은 악연)으로 묶여 있다는걸, 가령 수설이 거둬들인 의시합이라는 소년 환관의 경우 이번 수설을 주살하려 했던 어떤 인물과 연결이 되어 있다 같은. 그 연결이 연결을 불러 수설의 최대의 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어떤 소녀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흥미를 끌지 않을 수 없다. 혼을 달래며 타인과의 연결을 통해 수설에게 위협이 되는 세력 등 고구마 줄기처럼 여러 이야기가 합쳐지는 묘미가 대단하다고 할까. 그렇게 수설 혼자서는 감당이 되지 않은 일들을 황제 고준도 같이 거들어 주면서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 등은 읽는 이의 마음을 붙잡는데 일등공신이 아닐까 싶다.
맺으며: 이 작품은 인간의 시대에 신화적인 이야기를 가미한 판타지다. 신이 존재하고 혼과 주술이 존재한다. 상대에게 주술을 걸어 주살하는 건 예사고, 혼(귀신)이 아무렇지 않게 배회한다. 수설은 그런 혼을 달래 낙토(아마 저제상)로 보내는 일을 한다. 때론 주술도 거는 거 같은데 이건 잘 나오지 않는다. 다들 오비를 기피하는 이유로 주살을 들고 있다.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혼을 달래 낙토로 보내며 엮인 이야기들이 때론 수설의 신변을 위협하기도 한다. 이번에도 새로운 종교가 대두되면서 그녀를 주살하려는 음모가 드러난다. 수설은 여느 먼치킨과 다르다. 약간의 주술을 쓸 수 있을 뿐, 그러해서 언제나 힘에 부친다. 그럴 때마다 황제 고준은 그녀를 도와주고, 시녀 등 주변인들은 그녀를 돌봐준다. 이런 점들이 사뭇 흐뭇함을 자아내기도 하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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