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아무래도 1권을 다시 읽어봐야 할 거 같은 2권입니다. 사실 1권은 시빌라(히로인)의 복선이 너무 노골적이었고, 거기에 넘어가는 주인공이 어리숙하게 보여 좋게 보이질 않았거든요. 거기다 정통 추방물의 계보를 이어가듯 파티에서 쓸모 없어진 주인공이 쫓겨나는 구조는 여느 추방물과 비슷한 흐름이어서 식상한 부분도 있었고요. 하지만 1권 중후반부터는 여타 작품에서는 잘 없는 요소를 넣어 흥미를 끌려고 노력하기도 했었죠. 가령 뒤늦게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기로 한 '에미(히로인)'의 분투는 그야말로 희생이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 주었었습니다. 그러나 초중반까지의 이야기들이 클리셰 덩어리라는 이미지로 고착화되어 버려서 반전 시키기엔 늦어버렸지 않나 하는 그런 느낌도 있었군요. 그래서 2권을 구입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언급해 보자면 1권 클리셰적인 부분만 견딘다면 이 작품의 진짜 이야기를 볼 수 있다고 감히 말해봅니다.

사실 1권에서 받은 이미지 때문에 집중이 잘 안될 거 같았는데 의외로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건 어딘가 모르게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줄여서 내청코)" 같다는 생각이 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판타지를 제1 장르로 하고 있지만 그걸 기반으로 해서 청춘 러브 코미디를 그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청코와 완전히 같다는 뜻은 아니고, 그만큼 한창 청춘을 구가하는 나이대에 맞게 풋풋하고 애틋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인데요. 가령 사망 플래그나 다름없는 선물 이벤트도 준비했는데 사뭇 진지한 모습을 보이죠. 그리고 겨우 주인공과 만나 화해하고 합류하게 된 '에미'의, 좋아하는 사람 곁에 있고 싶은 마음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 올라 그녀에게 성기사(직업)로 있게 해주는 원천이 되고, 그런 '에미'의 마음을 보게 된 주인공의,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최고위 마법을 쓸 수 있게 하는 원천이 되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는 모습들이 상당히 인상적이죠.

그래서 '에미'를 보고 있으면 내청코의 '유이' 같은 느낌을 어느 정도 받게 합니다. 좋아해서 곁으로 왔지만 내색은 못하는, 지금의 관계가 파탄날 지 몰라 속으로만 마음을 키우고 그 마음이 너무 커져서 파탄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그런 아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그리고 아직 주인공과 합류하지 않은 '자넷(히로인)'은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내 의지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유키노' 같은 성격이 강했군요. 가장 흥미로운 건 내리는 비를 사람의 마음으로 표현하는 부분인데 완성도 높은 시를 보는 듯했습니다. 주인공에게 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마음, 소꿉친구 '에미'를 응원하는 마음, 홀로된 마음을 표현한 부분들은 구구절절해서 이 작품 유일하게 가슴 먹먹하게 만들었군요. 이 작품 최대 키 메이커인 '시빌라'의 경우는 그냥 '잇시키'가 성장하면 이럴 것이다는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대와 싸울 때 90%는 말로 죽일 정도로 독설을 날리고 깐족거리는데 당하는 쪽은 멘탈을 붙잡을 수가 없어요.

어쨌거나 저런 이야기들만 있으면 내청코 만큼이나 흥미진진했을 것이고 몰입도는 더욱 높았을 것이나 이 작품의 제1 장르가 판타지다 보니 이쪽에 많이 집중합니다. 시빌라+주인공+에미가 파티가 되어 던전에 들어가고, 유기적으로 협조하며 던전 최하층에 있는 마왕을 쓰러트리는 이야기를 주된 골자로 잡고 있죠. 이 과정에서 주인공을 바라보는 에미의 마음은 터질 거 같이 커지고(어릴 때부터 키워온 거라 개연성은 있음), 시빌라는 그걸 올바르게 잡아주는 등 어떻게 보면 하나의 인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거 같기도 했습니다. 최강의 조합으로 던전을 클리어하는데 아무런 문제점은 없고, 그래서 청춘 러브 코미디 같은 이야기를 빼면 솔직히 좀 지루합니다. 그래서 고아 소녀 한 명을 투입해 개연성을 높이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기도 하죠. 겸사겸사 놀러도 다니고, 선물이라는 이벤트도 벌어지고 그러다 마음은 더욱 커지고, 그런데 알고 보니 주인공은 상당히 둔하군요. 지키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그게 호감인 줄 모르는...

맺으며: 일단 러브 코미디 측면에서 보자면 100점 만점에 100점을 주겠습니다. 이 부분 그러니까 러브 코미디 분량만큼은 표현력에 있어서 내청코를 뛰어넘지 않을까 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비를 사람의 마음으로 표현하는 대목은 정말 대단했습니다(물론 필자 주관적이지만요). 여기에 '하치만'의 독백까지 더해졌으면 좋았을 텐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그런 기특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군요. 어쨌거나 판타지 부분은 100점 만점에 30점을 주겠습니다. 마왕을 쓰러트리는 과정이 나무 지리멸렬합니다. 던전 난이도가 높거나 마왕이 워낙 강해서 질질 끄는 게 아닌, 이 세계 모험가들은 꿈도 못 꾼다는 던전 하층에서 위기감 없이 널널하게 다니고, 기껏 만난 마왕은 성격이 급해서 주인공 일행을 기다려주지 않고 놀러나다니고(이것 때문에 이야기는 계속 반복됨), 그걸 또 못마땅하게 여기고 자기 취미에 심취한 귀족 같은 마왕이 꼴불견이라며 적대 운운하는 주인공은 약간 마이너스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시빌라의 진짜 목적이 참으로 궁금해진다고 할까요. 어둠의 여신으로서 주인공을 권속으로 만들려고 하는 느낌은 있는데, 마왕이 복선 띄우기도 했고요. 근데 그런 거 치곤 정성을 너무 많이 들이고 있거든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주고 조언해 주고 힘까지 줘서 주인공이 주인공으로서 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줘놓고 댓가를 바라지 않는, 그래서 가스라이팅이 보다 쉽게 먹혔는지 주인공은 완전히 시빌라를 철석같이 신뢰하게 되었죠. 이걸 노리나 싶기도 합니다만, 아직 복선은 없군요. 아무튼 보통 이런 장면들에서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동료를 신뢰하고 주인공을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닐까 싶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런 느낌보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마치 '리빌드 월드'의 히로인 '알파'를 보는 듯했습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주인공을 보살펴주고 자기 말 듣게 조절해서 내(알파)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게 '시빌라'에게서도 엿보이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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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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