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던전이 공략되지 않아 모험가들이 몰려들고, 몰려들면 퀘스트 발주하느라 정신없고, 모험가 = 무뢰배 공식답게 어중이떠중이 자기 잘난 듯 목소리 크면 이긴다는 마인드에 내가 누군 줄 알아?라며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들(모험가)을 상대하느라 오늘도 접수원은 이마에 핏대가 섭니다. 접수원 '아리나(이하 여주)'는 그런 모험가를 상대하느라 아주 죽을 맛이죠. 그녀가 바라는 건 딱 한 가지입니다. '평온'. 그런데 던전이 공략되지 않아 퀘스트를 받으려 북적이는 모험가들 때문에 평온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중이죠. 거기다 선배와 상사는 서류 뒤치다꺼리를 걸핏하면 그녀에게 떠넘겨주는 바람에 야근을 밥 먹듯이 합니다. 야근을 없애고 일거리를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선배들과 상사를 담그면 되나? 뭐 그럴 순 없고. 망할 모험가 시키들 얼른 던전을 공략해 줄 것이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무능하고 자빠졌다며 여주는 마음속으로 저주를 퍼붓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나. 니들(모험가)이 힘들다면 내가 해주지. 그녀는 변장을 하고 한창 공략 중인, 길드 최고위 파티들이 고전을 하며 퇴각을 고려하는 최전선에 난입합니다. 그리고 커다란 워해머를 꺼내서 던전 최종 보스인지 뭔지를 단 한 방에 보내 버리죠. 이제 던전이 공략되었으니 야근은 끝이라며 룰루랄라 길드로 복귀만이 남았는데...

접수원직은 현실 공무원처럼 평생 직장이고, 복지도 좋고,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꿈의 직장입니다만, 투잡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여주는 가명으로 모험가 등록을 해둔 상태고, 오늘같이 던전 공략이 지지부진하면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다혈질 소유자로서 세간에서는 그런 그녀를 '처형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물론 여주가 처형인인지는 아무도 모르고요. 들통나면 접수원직에서 해고되니까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있습니다만, 이번에 직접 던전에 내려갔다가 어느 파티 리더(이하 남주)에게 들통나버립니다. 평온을 사랑하고 안정적인 직장에서 무난한 생활을 하고 싶었던 여주에게 위기가 찾아오죠. 처음엔 들켰을 거라곤 꿈에도 모르다가 남주가 찾아와서 너 님 처형인 아님? 이번에 파티에 결원이 생겼는데 접수원 그만두고 우리 파티에 가입하실? 여주는 이 세계에서 한 차원 높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투기로 비유하자면 이 세계 모험가들이 F-16 급이라면 여주는 F-22(랩터) 급이죠. 세간에서 처형인은 신비함으로 아이돌급 인기를 끌고 있으며, 길드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중입니다. F-22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녀만 있으면 던전 공략은 너무나 쉽게 가능하니까요. 그러나 모험가 대응 접수원 생활 3년 차, 당연하게도 그녀는 불안정한 삶과 대출도 안 되는 모험가 따위 하고 싶지도 않아 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남주가 어떻게든 여주를 파티에 영입하기 위해 여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짓을 저지른다는 것이군요. 남주라는 타이틀을 달아주기 싫을 정도로 인간으로서 해선 안 될 짓을, 스토커라는 최악의 행동을 서슴없이 해댑니다. 여주가 가는 곳마다 미행해서 마치 우연인 듯 접근하고, 그녀의 의지 상관없이 파티에 들어오라 강제하는 통에 여주는 아주 기겁을 하죠. 워해머를 휘두르며 진짜 죽이겠다는 협박을 하는데도 남주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스토커가 범죄인 이유가 여기에 있죠. 여자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고 자기만족만 추구하는. 기둥서방이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순진한 여자 꼬시듯 친한 척 굴고, 여주가 싫어하는데도 식당에서 옆에 붙어 앉는다거나(여기도 미행으로 따라옴), 나중엔 여주 집이 부서져 여관살이 중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아침에 찾아와 그녀를 불러 대죠. 자기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길드 마스터를 움직이고, 침실에 난입하고, 진짜 소름이 다 돋습니다. 이런 인간이 도시에서 최상위를 달리는 파티를 꾸리고, 자상함과 잘생긴 외모로 여자들에게 절대적인 신뢰와 호감을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질이 나쁜 게 겉으론 선 한 척, 이면엔 전형적인 악당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싫어도 남주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악의는 없다 해도 행동 하나하나가 현실에서 심각한 범죄에 해당하지만 사법 쪽에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전형적인 스토커 형질이라는 것에서 굉장히 혹독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바로 여주의 행동이죠. 이런 질겁할 행동을 하는 남주를 진짜 반죽음으로 만들어서 곁에 못 오게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여지를 줌으로써 남주로 하여금 스토커 짓을 계속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물론 진짜로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남주의 성격도 있고, 던전 최전선에서 활약 중인 그를 리타이어 시키면 야근이 끝도 없이 늘어나는 부조리도 있어서 이도 저도 못하는 중이긴 합니다만, 여기서 제일 문제는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작가겠죠. 결국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처럼 흘러갑니다. 여주 주변을 맴돌며 짜증은 나게 하지만 그렇다고 나쁜 짓은 안 하는, 악의는 없으니까, 서류 처리도 도와주고 친근하게 말도 걸어주니 조금씩 쓰레기 스토커(남주)에게 마음이 생기는 여주를 보고 있으면 아주 그냥 환장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히로인이 질 나쁜 남캐릭을 좋아하는 속칭 비처녀 논리가 아니라 범죄(스토커)에 굴복하는 이야기로 이끌어 가니까, 정상적인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준법정신에 반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니까 진짜 어이없음이 하늘을 찔러준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어느 순간부터 파티 영입에서 여친 만들기로 선회한 이야기는 여기에 기름을 붓습니다. 스토커가 결국 승리해서 싫다는 여자를 강제로 취하는 그런 느낌이 장난 아니었군요.

맺으며: 사실 지적할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 할 스토커 짓에 대한 단죄가 없다는 것, 결국 그 스토커에게 굴복하는 여주, 파티 영입은 뒷전이 되고 여주를 여친으로 만들어보겠다고 변질되어 가는 남주, 이런 시키가 어째서 남주일까 생각을 들게 하는 저질스러운 행동들(싫어하는 여주의 감정을 철저히 무시하니까 여기서 반감이 제일 크게 온 듯),이걸 포장해서 순애로 만들어가는(여기서 두 번째 반감 생김) 작가, 절대적인 비밀이었을 터인 처형인이라는 이중생활을 지킬 생각이 없는 여주의 답 없는 행동들, 갈수록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버리는 게 웃겨 줍니다. 결국 야근도 자업자득이 되어 가고, 길드 마스터에게까지 정체가 발각되어 이용만 당하고, 길드 마스터가 내건 보상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아 먹튀 당하고, 그럼에도 처절하리만치 접수원직에 고집하는 여주, 그 이유로 어릴 적 어느 모험가와의 약속 때문이 아닐까 하는데 개연성 없이 감정이입만 엄청 해대서 어리둥절하게 만들기, 말은 불안정한 모험가의 삶이 싫다지만 남주의 으리으리한 삶에서, 그녀보다 능력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남주가 그 정도의 삶을 보여주는데 여주의 능력이라면 성(城)을 구입해서 안락한 삶을 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텐데도 하지 않는 변태성, 중반부터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지 하는 생각을 들게한 두 번째 작품입니다. 공교롭게도 첫 번째 작품도 본 작품을 출판한 출판사의 작품이라는 것이군요. 내게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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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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