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에게 속아 수백 년간 마을에서 풍작의 신 노릇을 했던 호로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걸 넘어 '너 같은 거 이제 필요 없어'를 외치는 마을 사람들에게 질려서 마침 마을에 들렸던 행상인 로렌스의 마차에 숨어 들어서 마을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얼결에 그녀를 언젠가 고향 요이츠에 대려다 주기로 한 로렌스, 그런 그에게 자신의 현명함으로 장사하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호로,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이번에 호로는 사기당할뻔한 로렌스를 구해주게 되는데요.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호로의 덕분에 제법 큰 돈을 벌게 된 로렌스는 내친김에 사기칠려던 상인을 협박해 외상으로 물건을 매입해 다른 마을에서 팔기로 했지만 겹사기를 당해버렸다는 걸 뒤늦게야 알게 되었습니다. 외상으로 구입한 물건의 대폭락, 이대로 가다간 파산을 물론이고 외상값을 몸으로 갚아야 돼서 노예로 끌려갈 판입니다. 로렌스가 외상으로 구입할 때 판 놈은 이미 이 물건은 가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그에게 떠 넘긴 것, 그것도 모르고 로렌스는 사기당할뻔한 걸 되 갚아 줬다고 좋아했는데 이 무슨...


이번 에피소드는 파산으로 노예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다시 일어서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로렌스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천하의 현랑 호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겹사기라는 꿈에서도 똥 밟을 일을 로렌스가 당해버렸습니다.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 호로는 금 밀수를 제안하고 로렌스는 결국 받아들입니다. 잘하면 돈방석, 못하면 사형, 모 아니면 도, 일이 틀어지면 호로가 변신하여 로렌스를 들쳐 업고 도망치면 된다는 궁극의 부부 사기단의 최초 업적(?)이 시작되는데요.


그리고 애절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양치기 '노라'가 부부 사기단의 동료로 가입합니다. 매번 양들을 무사히 방목하고 돌아오는 그녀에게 교회는 악마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피리를 불며 양들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양치기를 이교도 주술사쯤으로 여기는 세간의 인식 속에서 노라는 맡은 바 임무를 무사히 수행 했음에도 오히려 그것이 의심을 사 교회로부터 불합리를 받고 있었습니다. 현실에서도 있죠. 현명하고 일 잘하는 사람은 호구 취급받는 거, 노라가 당하고 있는 건 조금 다르지만요.


여튼 언제나 궁핍한 삶, 언젠가 내 가게를 내고 재단사가 되고 싶다는 노라, 그러나 양들을 한 마리도 잃지 않고 방목지에서 돌아왔음에도 그녀에게 떨어지는 돈은 없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로렌스가 제안한 금 밀수를 덥석 물어 버리게 되고 그녀의 파란만장한 하루가 시작됩니다. 교회에게 물먹고 있으니 답례로 같은 물을 건네는 게 도리라는 로렌스의 사탕발림, 노라와 이야기하는 로렌스를 질투하는 호로의 귀여움과 꼬리의 위대함이 절절히 묻어나는 가운데 결행일이 다가왔습니다.


요망한 호로, 괜히 몇백 년을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로렌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그가 뭘 생각하는지 단박에 맞추고는 무안 주기를 반복하면서도 애교로 살살 녹이는 호로의 요망함을 보고 있으면 '장난을 잘 치는 타카기양'을 생각하게 합니다. 먹는 것에 환장하여 먹을 것 이야기만 나오면 꼬리를 빠질 듯이 흔들어 대고, 그것을 지적하면 새침해지는 귀여움, 진짜 깨물어 주고 싶은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납니다. 그런 호로에게 빠져들어 애처가가 되어 가는 로렌스, 밑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호로에게 돈을 갖다 바치면서도 그는 그녀와의 여행이 언제까지고 계속되기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겹사기를 당하면서 더 이상같이 할 수 없다는 일말의 불안이 이들을 엄습하게 되는데요. 파산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어떻게든 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로렌스, 그런 와중에 자신만은 어떻게든 여행을 계속하게 해주려는 로렌스를 바라보며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마는 호로, 노예로 끌려가 일생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자신 때문에 돈 꾸러 다닐 때 문전박대 당했음에도 꿋꿋하게 자신을 챙겨주는 그를 바라보는 호로의 호감도는 단숨에 치솟습니다.


필자는 이런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남의 불행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역경을 뛰어넘어 성장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엔 충분했습니다. 특히 금 밀수에서조차 사기당한 로렌스를 보라보며 뿜어내는 호로의 분노는 다이렉트로 느껴질 만큼 작가의 필력이 대단했군요. 그 와중에 비에 맞을까 로렌스가 품 속에 고이 접어둔 자신의 옷을 호로가 꺼내는 장면은 이번 에피소드에서 최대의 백미였죠. 또다시 로렌스를 향한 호로의 호감도는 치솟습니다.


풍작의 신이자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호로, 로렌스의 거짓말을 간파하여 일갈을 날리기도 하고, 때론 평범한 소녀처럼 그에게서 사랑한다는 세레나데를 듣고 싶어 합니다. 상인 이야기만 없다면 영락없는 가슴 시린 여행길이 아닐까 하는, 그런 와중에 늘 꼬리를 신경 쓰며 치장하기 바쁜 호로는 자신의 꼬리의 위대함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마지못해 꼬리를 칭찬하자 콧대가 뾰족해지는 호로, 언제나 먹을 것에 환장하여 꼬리를 연신 흔들어 대는 게 영락없는 개의 모습입니다.


호로를 보고 있으면 이런 히로인은 참 드물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도 감정을 무뎌지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새침해지고도 하고, 웃기도 하고, 때론 가슴 아프게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상대의 감정에 일희일비하기도 하고, 의자 하나 못 드는 연약함을 보여주다가도 남편의 위기에 세상을 멸망 시킬 것처럼 분노에 몸을 떠는 호로에게서 귀기가 서리기도 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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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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