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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가 죽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주는지를 보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비단 죽은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기도 한데요. 실종이라던가 다쳤을 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걱정해주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주인공 벨의 진가는 어느 정도일까. 작가라는 창조주의 의지에 따라 주인공 성향도 바뀌기도 하고 그걸 읽는 독자들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휩쓸릴 뿐이니까 사실 '진가'라는 잣대(?)를 픽션의 주인공에게 적용시키는 건 다소 무리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픽션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고 그걸 보며 우리도 그런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해주니까. 그래서 감성이 풍부한 젊은 층이라면 열광할만한 이야기가 바로 이런 작품일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진실된 친구를 두느냐. 옛 동화처럼 돼지 시체를 짊어지고 친구에게 찾아가 살/인을 저질렀으니 도와 달라고 했을 때의 반응에서 진정한 친구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전반부 벨과 인연이 닿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처절한 전투는 벨이 얼마나 많은 진실된 친구를 두었는지 절절히 보여주는 게 아니었나 합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벨과 류를 찾기 위해 심층으로 내려가는 [헤스티아 파밀리아]의 일동을 위시한 연합 파티는 '몬스터렉스 암피스바에나'를 만나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류를 처치하기 위해 함정을 팠던 [루드라 파밀리아] 쥬라와 터크에 의해 25계층 통째로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 만난 최악의 적. 애초에 그 계층에 맞지 않는 쪼렙인 이들이 맞설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님을 뼈저리게 느껴가지만 한편으로는 언제까지고 벨에게만 기대어서는 성장할 수 없다는 착한 생각으로 지렁이의 저력이 무엇인지 보여주려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흔히 파워 인플레의 격랑 속에서 필연적으로 도태될 뿐인 조연들의 반란이라고도 할 수 있군요.


위기를 뛰어넘었을 때. 벨이 미노타우로스와 격전을 펼치며 보다 한 차원 높이 성장하였던 것처럼, 벨프를 위시한 파티 연합은 죽을 동 살 둥 발버둥을 처가요. 사실 여기가 분기점이 아니었나 합니다. 현상범 류를 잡기 위해 라빌라 마을에서 총출동한 모험가들은 '저거노트(쥬라에 의해 소환된 던전 면역체)'에 의해 힘도 못 써보고 다 나가리 되는 상황에서 벨의 주변 인물들도 죽이느냐 살리느냐의 분기점. 작가는 딱히 언급은 없었지만 느낌상 그랬군요. 여기서 만약 하나든 둘이든 죽었을 때 벨은 정신적으로 보다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자기의 행동에 따라 무엇이 바뀌어 가는지도 좀 표현했더라면 좋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


후반부, 심층 37계층에 떨어진 벨과 류의 생환기가 시작됩니다. '저거노트'의 추격을 받으며 벨과 류는 무사히 지상으로 갈 수 있을까. 26계층에서의 사투, 저거노트와의 싸움에서 빈사상태가 되어 버린 두 사람의 눈물 어린 노력은 던전이 보내는 무시무시함에 물거품이 될 뿐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은 영웅이 갖춰야 할 소양이라는 것마냥 벨은 쓰러져가는 류를 들처업고 출구가 어디인지도 모를 미궁을 헤매어 갑니다. 들이닥치는 몬스터는 하나같이 위험한 것들이고, 만신창이가 된 몸은 그냥 여기서 포기하자라는 신호를 보내옵니다. 그리고 마침 어느 룸에서 맞닥트린 해골로 변한 모험가 시신 세 구...


이야기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쉽게 광렙했던 벨을 비웃기 시작합니다. 37계층에서의 레벨 4인 벨은 막 1렙일 때 1층에 도착한 벨과 동의어라는 걸 서술하기 시작하죠. 적정 레벨인 계층이라도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직시하라고 던전은 벨에게 채찍을 때려댑니다. 패닉에 빠져가는 벨을 보다 못해 어드바이스를 시작하는 류, 류의 레벨도 4이죠. 같은 레벨이라도 경험의 차는 이리도 크다는걸. 벨은 깨달아 갑니다. 이 부분은 성장은 하였어도 애는 애라는 걸 잘 표현하고 있지 않나 합니다. 류에게서 어드바이스를 듣는 벨의 모습에서 이것은 아이즈에게 수련 받던 시절의 평행 세계가 아닐까 하는 착각을 불러오기도 하죠.


벨의 성장. 37계층은 그동안 광렙으로인한 후유증이 없다는 비현실적인 부분을 없애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깃들었는지 초심으로 돌아가 그에게 있어서 빠진 무언가를 채워주는 그런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여긴 학교가 아님을, 애초에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이 류에게 있다는 걸 작가는 잊지 않고 있다는 것마냥 과거의 주박에 사로잡혀 스스로 생명이라는 촛불을 꺼버리려는 류의 시련도 시작됩니다. 벨을 지상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그녀의 처절한 노력은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리죠. 과거의 주박에 사로잡혀 잘못된 정의의 길로 들어서버린 어느 엘프의 가슴 아픈 이야기. 5년 전 동료들의 복수를 위해 가혹한 운명을 짊어졌던 엘프가 지금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은...


후반부는 벨의 성장과 류의 성장이 자아내는 하모니라 할 수 있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 얻는 건 하나도 없다는 진실 앞에서 그래도 할 수밖에 없었던 추악한 마음에 사로잡혀버린 류에게 벨이 던지는 상냥한 말들, 37계층에 떨어져 언제 죽을지도 모를 상황을 초래한 장본인. 죄(과거 복수극)를 저질렀음에도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죄인. 그러니까 그때(5년 전) 구하지 못했던 동료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자신의 목숨을 바쳐 그를 살려 보내는 것, 하지만 지금 곁에 있는 이는 누구?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 엘프에게 살아갈 의미를 부여해주며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려는 벨의 노력도 참 눈물 없인 볼 수가 없었습니다.


맺으며, 글이 길어졌군요. 이번 14권은 페이지 수가 무려 640페이지나 되다 보니 다 표현을 못 하겠군요. 어떻게 보면 정석적인 소년물과 영웅물에서 보는 클리셰적인 흐름이긴 한데, 그래서 그런지 작가는 류의 과거를 접목시키면서 읽는 독자로 하여금 상당히 센티하게 합니다. 후반부를 넘어가면 사실 벨 따위보다 류의 가슴 아픈 이야기만이 가슴에 와닿았군요. 그리고 생명이라는 촛불을 꺼버리려 하는 히로인을 일으켜 세우는 역할은 주인공이라는 것마냥 포기하지 않는 벨에게서 과거 자신(류)이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 지하는 부분도 참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지나간 과거는 돌아오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보여주죠.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자면 전투 부분은 딱히 새로울 건 없습니다. 몬스터를 쓰러트리고 강대한 적을 물리친다. 죽을 거 같으면서도 죽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긴 하는데 약간 2% 부족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군요. 다 죽어 가면서도 전투에선 반드시 이기는, 죽으면 그걸로 끝이니까 죽이면 안 되긴 합니다만. 뭐랄까 약간 표현력이 부족하다고 할까요. 구조대의 개입으로 조금 더 드라마적인 환경을 만들 수 있었음에도 재난 영화처럼 다 끝나고 나서야 등장시키는 클리셰는 좀 아닌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류의 내면적인 표현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그동안 거의 없었던 연약한 모습과 소녀 같은 모습은 많은 남정네의 가슴을 뛰게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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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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