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병과 연애질이라는 환상의 콜라보를 만끽해보세요. 적나라하게 표현은 안 되어 있지만 주인공 나구모가 토끼족 시아를 드디어 애인으로 맞이들여서 애가 기절할 만큼 기본 좋게 해줬다는 둥, 솔로가 본다면 책을 찢어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핑크빛이 만연합니다. 유에 일편단심이었던 주인공,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더니 시아는 8권 동안 개고생 끝에 드디어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그걸 바라보는 카오리를 비롯한 다른 히로인들은 손가락만 빨고 있으니 불쌍하기도 하군요. 하지만 마냥 손가락만 빨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양 이번에 도전할 히로인은 표지모델이기도 한 '시즈쿠'가 되겠습니다.

 

나구모랑 같은 반 출신이고, 진히로인이었다가 '유에'에게 자리를 빼앗긴 카오루와 절친 사이기도 하고, 타인을 보호하려는 넘치는 카리스마에 검 도장을 하는 집안 내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시즈쿠)는 검 실력이 굉장히 좋아요. 숭상 받는다고 할까요. 학교에서 남녀 가리지 않고 누님, 언니의 포지션을 차지할 거 같은 여장부 같은 모습이지만 실상은 여자애답게 나도 누군가가 보호해줬으면, 구해주 줬으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여린 마음을 품고 있기도 하죠. 그 대상이 나구모라고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하지만요. 그런 자신의 마음보다 주변을 우선시하다 보니 언제나 손해만 보는 입장이었죠.

 

주변도 남의 마음을 모른 채, 그저 여장부같이 싸움 잘하게 생겼네, 네가 나서서 우리 좀 보호해줘! 이러니 마음이 좀먹어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러던 차에 1권 때던가 2권 때던가 주인공 나구모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족의 공격에서 죽자 살자 동료들을 지키며 싸우다가 힘에 부쳐 죽기 직전에 주인공 나구모에게 구해졌으니 내게 있어서 왕자님은 정해진거나 다름없게 되었죠. 하지만 그때까지도 진히로인이었던 카오리가 주인공을 좋아하고 있었던지라 친구를 배신할 수 없었던 그녀는 또다시 자기 마음을 죽일 수밖에 없었고 그게 쌓이고 쌓여 이번 [빙설 동굴]에서 터지는 바람에 아주 개고생의 끝판왕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제일 불쌍한 캐릭터라 할 수 있죠. 그동안 유에+시아에 묻혀 나름 히로인임에도 임팩트 하며 존재감이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주인공 하렘 군단에 이제 시아 다음에 들어올 히로인으로 너로 정했다는 식으로 작가가 아주 굴려 댑니다. 이번 [빙설 동굴]은 클리어 조건이 '눈을 돌리고 싶은 더러운 마음, 현실 도피'에서 이기는 마음을 실험하는 것이기에 시즈쿠의 마음은 [빙설 동굴]과 상성이 최악이라 할 수 있죠. 친구 남친을 빼앗는다는 배신감, 타인을 위해 자기 마음을 죽이고 있는 감정을 까발려야 하니 섬세한 그녀로써는 클리어 불가능에 가까웠고 결국 엄청 구른 끝에 이 작품에서 가장 극적인 히로인으로 등극하게 되죠.

 

시즈쿠만 주야장천 이야기하고 다른 히로인은? 시즈쿠가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이번엔 다른 히로인들은 다 묻혀 버렸습니다. 그저 장난이나 치고,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대미궁 시련을 만나 돌파하고 주인공과 알콩달콩 하는 게 솔로가 본다면 백 번은 더 도서를 집어던졌을 일이 반복해서 펼쳐져요. 필자는 웬만하면 참고 보는데 정말 닭살이 돋아서 도저히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2병일 때부터 알아봤지만 작가 내면엔 창피함이라는 감정은 없나 봐요. 단칸방의 침략자 20권 이후를 보시는 분들이라면 십분 이해가 될걸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아 필자는 하차를 했었는데 이 작품에서 같은 분위기를 다시 만나니 이거 진짜...

 

어쨌거나 이번 대미궁 시련은 자신 내면에 감춰진 현실도피와 마주한다는 시련입니다. 가령 주인공 나구모가 개조되다시피한 몸을 이끌고 현세로 돌아갔을 때 가족들은 그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진정 네가 우리 아들 맞느냐?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과연 주인공은 버틸 수가 있을 것인가. 내가 있을 곳으로 왔는데 정작 내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두려움, 보통 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들겠죠. 자, 이 두려움을 넘어선 자만이 미궁을 돌파할있다라고 하는데요. 근데 왜 사람을 줘패고 그럴까요. 분신이 나와서 사람을 개 패듯 패는데 마치 드래곤 볼의 손오공이 신(神)을 만나 분신을 만들어 수련하는 거랑 비슷한 일이 막 벌어집니다.

 

용사 코우키도 주인공과 같이 다니며 힘을 키우고 있는데 얘 또한 시즈쿠만큼이나 참 극적인 캐릭터입니다. 주인공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 못마땅해서 마음을 좀 먹히고, 그런 주제에 꼴에 용사랍시고 미궁을 돌파하며 성장해가는 모습이 참 처연하죠. 여자에게 인기 있으면서 정작 진정으로 생각해주는 여자는 만나지 못하는 올곧은 성격의 소유자가 앞으로 어떤 활약을 보일지... 그러고 보니 초반 성선설(1)로 중무장해서 그렇게나 고구마를 선사하더니 이제 좀 철이 들었는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 김빠진 사이다가 되어 버렸습니다. 덕분에 분위기도 코믹처럼 되어 버렸다랄까요.

 

맺으며, 역시나 이 작품은 1권만 보는 게 정신 건강상 좋겠습니다. 중2병까지는 봐주겠는데 간드러지고 닭살 돋고 설탕을 말통으로 집어넣어 달인 듯한 잼 같은 이야기는 도저히 맨 정신으로 볼게 못 되었군요. 이걸 10권에서도 다시 봐야 한다니 진절머리가 납니다. 아무튼 집에 가는 단서를 잡은 주인공 나구모 일행의 최후의 시련입니다. 이 시련을 넘어 과연 무사히 집으로 갈 수 있을까라고 해도요. 이미 웹 버전이 결말 나버린 시점이고 그 결말을 알아버린 필자로써는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군요. 그보다 달달하다 못해 쓴맛이 나는 이걸 계속 봐야 하는지 그게 더 고민입니다. 시련이야 어차피 다 넘겠죠. 차라리 웹 버전을 배신해서 다 죽어버리면 좋겠건만...

 

  1. 1, 인간의 성품이 본래부터 선(善)한 것이라고 보는 맹자(孟子)의 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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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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