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 하세요.

이번 12권을 표현하라면 부제목이 딱 어울리지 않을까 싶군요. 동네에서 매너 있고 자상했던 사람이 알고 보니 살인마더라라고 한다면 얼마나 소름이 돋을까요. 철저한 내면 연기로 주변을 속이고 뒤로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사람들을 죽이는 걸 일상으로 삼고 있던 사람, 그래도 감 좋은 사람은 이웃이 가진 위화감을 느끼고 경계는 했더랬죠. 하지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요. 게다가 이웃은 피에로까지 준비해두면서 철저한 위장한 덕분에 꼬리를 쉽게 잡을 수가 없었죠. 불의에 맞서고 도시의 미증유의 사태에도 힘을 보태는 통에 주변의 의심은 깊어지지가 않았어요. 그만큼 이웃은 용의주도하였고, 그로 인해 보다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데 필요한 시간을 벌고 말아요.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이 난 시점에서 이웃이 가진 위회감의 정체를 밝혔지만 때는 늦어 버렸습니다.

 

뭣 때문에 손을 내밀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친구가 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파티 브레이커로 모험가들에게서 멸시의 대상이 되어 오로지 혼자 다니는 검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그녀가 애처로워 손을 내밀었는지도 모릅니다. 들판에 혼자 핀 고고한 들꽃처럼, 다가오는 걸 거부하듯 가시로 무장한 검은 장미처럼, 놔두면 언제가 무너지고 고독하게 혼자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을 내밀었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내밀어진 그 손은 얼마나 따뜻했던가.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절망만을 안고 살아가던 그 검은 머리칼의 소녀가 내밀어진 손을 부여잡고 새로운 길을 걸었다면 미래는 바뀌었을까. 만약 좀 더 일찍 그녀와 만났더라면, 그런 부질없는 소망은 손바닥 사이로 빠져나가버린 물처럼 둘의 사이에 종말을 고합니다.

 

위 두 문단은 이번 12권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알고 보니 사이코패스인 이웃에 충격을, 알고 보니 절망만을 안고 살아가던 소녀가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의 따뜻함을 잊지 못해 망설임과 방황 그리고 결단이라는 끝맺음. 이블스 잔당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로키 파밀리아]를 위시한 연합군은 1차전에서 대패를 해버렸습니다. 적이 남긴 함정은 많은 모험가의 생명을 앗아가버렸죠. 특히 검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엘프 '피르비스'의 사망은 독자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감이 좋은 사람은 이미 이전부터 그녀의 죽음과 죽음 이후의 행적이라는 복선을 알아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위화감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피야는 그녀(피르비스)의 진실을 알아가려 하죠. 친구가 죽었다는 충격을 딛고 일어서 진실과 마주한 그녀가 벨 못지않은 영웅전설을 만들어 가는 게 이번 이야기의 포인트라 할 수 있습니다.

 

제목에 스포주의라고 해뒀지만 그래도 스포 한다고 항의하는 분들이 계셔서 요즘은 핵심 인물에 대한 스포일러를 자중하려다 보니 리뷰가 자꾸 두리뭉실 해지는데요. 이번에도 그래요. 이블스 잔당을 이끌고 뒤에서 오라리오 붕괴를 주도했던 신(神)의 존재는 이름만 밝히면 누구나 다 아는 존재이죠. 그래서 이번 리뷰를 어떻게 써야 되나 두 시간 넘게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군요. 이미 피르비스가 언급된 점에서 감이 좋은 분들은 눈치챘지 싶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선악을 가르는 히이로물에서 알고 봤더니 악당은 사실 선한 사람이었고 시대와 현실이 악으로 물들게 했을 뿐이라는 성선설을 기반으로 하는 이야기는 필자가 매우 싫어하는 주제인데요.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악당은 그렇지 않다는 것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줄만 했습니다.

 

뭔 말이냐면, 그냥 혼돈의 도가니를 즐기기 위해 도시를 붕괴 시키고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희열을 느끼는 사이코가 악당이라는 거죠. 여기에 이유나 명분은 없어요. 그래서 죽으면 찝찝한 악당이 아닌 죽어서 시원한 악당이 나온다는 거죠. 하지만 여기서 명확히 해야 될 점은 이블스 잔당을 뒤에서 조종했던 어떤 신(神)만이 그렇다는 것이고, 레피야가 진실을 찾아 도달했던 어떤 인물의 경우는 좀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년 전 던전에서 맞이한 절망만을 안고 죽지 못해 살아가던 그 존재는 레피야를 만나 빛을 보게 되었지만 모든 게 늦어버린 상황. 여기서 갈리는 게 성선설로 그 존재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죽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레피야를 후자를 선택하죠. 그 선택의 기로는 처절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지막 레피야가 목놓아 우는 모습의 일러스트는 먹먹하기 짝이 없었군요.

 

피의 축제를 즐기기 위해 십수 년 전부터 시나리오를 구상해왔던 어떤 신이 일으킨 미증유의 사태, 던전의 도시 오라리오가 붕괴할지도 무른다는 위기감에 모든 모험가들이 나서서 치르는 대규모 전투, 외전에서는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던 [프레이야 파밀리아]까지 나서지만 사태는 녹록지가 않습니다. 벨을 위시한 [헤스티아 파밀리아]까지 투입되고, 제노스와 오라리오 외부에서까지 전력이 투입되는 등 이제까지 등장했던 등장인물들이 총망라되어 사력을 다하지만 흑막이 준비한 진짜배기는 사람들을 경악 시키기에 충분했군요. 모든 노력들이 허사로 돌아갈 찰나에 우리가 바라는 영웅은 누구인가. 흑막이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던 단 한 사람, 시대가 영웅을 바랄 때 우리가 생각하는 그가 나타난다. 이걸 두고 전문 용어가 있었는데 생각이 안 나는군요.

 

맺으며, 3부 최종 편이라고 합니다. 원래 12권에서 외전은 끝내려나 했나 본데 작가가 아쉬웠는지 후기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고 찾아온답니다. 요정 각성 편이라는 걸 보니 아이즈의 이야기는 아닌 거 같고, 이번에 대단한 활약을 보인 데다 성장통을 겪은 레피야 혹은 방황의 류가 아닐까 싶더군요. 둘 다 엘프라는 요정이니까. 레피야의 경우 벨에 필을 받은 로키가 벨처럼 스테이터스를 S까지 올리고 나서 랭크업 시키려고 묵혀 두었는데도 레벨 4로 올린 거 보면 앞으로 집중 성장시키려는 의도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요. 하지만 활약은 많이 하는데 임팩트가 와닿지 않아 각성 편에 쓰일 주제로는 적합해 보이지는 않았군요(물론 필자 주관적인 생각). 그렇다면 이블스와 인연이 깊은 류가 아닐까 싶었는데요. 이번 흑막 신(神)이 류가 과거에 속했던 파밀리아를 언급하기도 했고(보면 이런 이야기가 복선이 되는 경우가 있음), 이번에 이블스를 완전히 소탕하기도 했으니 이제 본모습을 찾으려 하지 않을까 싶었군요. 근데 류는 또 다른 외전인 파밀리아 크로니클에서 이야기를 이끌고 있어서 아닌 거 같기도 합니다.

 
블로그 이미지

현석장군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083)
라노벨 리뷰 (925)
일반 소설 (5)
만화(코믹) 리뷰&감상 (129)
기타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