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심한 스포일러 주의

 

 

 

 

 

 

자, 풍족하진 않지만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세계가 있다. 폭력은 금지되어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다. 노력에 따라 장소만 잘 찾아내면 부를 쌓을 수도 있다(먼저 발견한 사람이 임자다). 이런 모든 삶을 정부가 보장해서 빼앗고 빼앗기는 살벌한 세상은 인정되지 않는 평화 그 자체다. 하지만 누구나 다 혜택을 보는 건 아니고 살아가려면 소정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사람은 6살이 넘어가면 정부에 돈을 지불해서 살아갈 권리를 획득해야만 한다. 지불하지 않을 경우 추방된다. 폭력은 이유고하를 막론하고 추방된다. 기물을 파손해도 추방된다. 사람의 몸에 칩(스이카)이 심어져 통제되는 사회다. 얼핏 사회주의 국가 같은 세상이라 할 수 있다.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은 끔찍한 곳일 것이다. 에덴의 동산에서 뱀은 왜 사과를 따먹었을까. 그래도 사람들은 여기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면, 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했으니까. 

 

이 작품은 AI에게 자기 결정권을 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겨울 전쟁(아마도 3차 대전)이 한창 치열하게 전개 중이던 시절, 일본은 전략 병기로서 고도의 인공지능을 개발한다. 하지만 적국의 공격으로 서버를 분산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 전국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JR 철도역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통합지성체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이는 서버(역)가 철도를 따라 전국에 퍼져 있어서 과반수 이상이 파괴되지 않는 이상 기능을 상실하지 않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한가지 실수를 저지른다. 통합지성체에 제어장치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날로 격해지는 전쟁으로 인해 역의 파괴가 늘어났고, 이에 인간의 수리로는 복구되지 못한다는 결정을 내린 통합 지성체는 한가지 대안을 내놓는다. "내가 알아서 수리할게" 역은 자가증식을 시작한다.

 

통합지성체의 결정에 따라 그 첫 번째로 자가 수리에 들어간 역이 요코하마 역이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요코하마 역은 파손된 부분만 복구하는 게 아닌 개축을 맘대로 하더니, 끝끝내 세포가 분열하듯 증식을 시작해 전쟁이 끝나고도 증식은 멈추지 않게 된다. 일본 혼슈(후쿠오카, 혼슈, 시코쿠, 훗카이도중 제일 큰 섬) 지방 대부분을 침식, 일본 정부는 대응하다 와해, 살아남은 인간은 훗카이도와 후쿠오카에서 방어전을 치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에 대항하는 인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기계가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것과는 반대로 요코하마 역은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초반에 언급한 풍족하진 않지만 살아갈 수 있고 폭력이 금지된 세상이다. 역 내부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으로 개축되었고, 삶에 필요한 물자도 역이 인간의 옛 지식을 빨아들여 복제를 통해 생산 중이다.

 

어쩌면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지에서 이보다 축복받은 땅은 없을 것이다. 증식하면서 공포영화처럼 인간을 깔아뭉갠다든지, 흡수한다던지 그런 건 없다. 사람들은 그렇게 200년을 살아오게 된다. 하지만 통제받는 세상이 좋을 리 없다. 사소한 폭력이라도 일으키면 죽음뿐인 장소로 추방되는 가혹한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역내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6살이 되기 전에 스이카 인증을 심지 않으면 알짤없이 역 밖으로 추방된다. 바닷가 같은 공간이 있는 곳이라면 모를까 아무것도 없는, 심지어 역 대합실 만한 공간에 버려지기 일쑤라 추방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사람은 어쨌거나 자유를 갈망한다.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라도 통제된 사회 보다 먹고살기 힘들어도 자유를 원한다. 그래서 역내에서는 저마다 세력이 존재하며 역에 충성하는 사람과 역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공존하게 된다.

 

주인공 '히로토'는 바닷가 99계단 아래에서 살아간다. 그에겐 스이카라는 인증이 없다. 그래서 역내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도 역 밖으로 배출되는 쓰레기를 뒤져 살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 밖으로 추방된 사람들 상당수가 이렇게 살아간다. 하지만 적응을 못해 죽는 사람이 더 많다. 히로토의 부모는 몇 세대 전 추방된 '아이들'이다. 이 작품은 잔혹한 동화를 그리고 있다. 역내에서는 6살이 넘기 전에 스이카 인증을 몸에 심지 않으면 추방된다. 여기엔 돈이 들어간다. 역 안이라고 모든 사람이 잘 살지 못한다.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는 반드시 발각되고, 역 순찰기구에게 아이를 빼앗긴다. 그렇게 빼앗긴 아이는 바닷가로 추방되면 살아가는데 일말의 희망은 있다. 하지만 산간부 아무것도 없는 곳에 추방되면 며칠 못 간다. 요코하마 역은 사람을 역의 일부로만 치부하고 판단한다. 6살이 넘으면 이물질로 판단한다. 스이카 인증은 역의 일부라는 증표다.

 

이 작품은 세 가지 메시지를 던진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세상에서 그나마 먹고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다행이 아닐까?라는 것과 자유 없이 그저 던져지는 먹이만 받아먹고 살아간다면 돼지와 뭐가 다른가다. 히로토에게 어느 날 어떤 단체에 속한 사람이 찾아온다. 역내를 해방하고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단체의 그 사람은 히로토에게 한가지 부탁을 한다. 역에게 쫓기고 있는 단체의 리더를 찾아내 도와달라는, 히로토는 5일간 쓸 수 있는 역내 여행권을 얻어 그 리더라는 사람을 찾아간다. 그리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훗카이도에서 파견된 공작원을 만나면서 요코하마 역이 가진 본질을 알아가게 된다. 요코하마 역의 증식을 멈추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역할을 맡게 되면서 5일간의 여정을 그리게 된다. 참고로 마지막 세 번째 메시지는 진 엔딩과 연결되어 있어서 언급은 힘들다.

 

통제가 무너지면 사람들은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보여준다. 역 밖의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필사적이다. 약탈이 횡행하고 사람들이 막 죽어 나간다. 아이라니 하게도 증식하는 역에 의해서가 아닌 인간들끼리 남은 물자를 빼앗기 위해 서로 죽이고 죽고 하는 것이다. 역의 증식으로 농사지을 땅은 거의 없다. 농사짓는 방법도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된 듯하다. 그러해서 안전한 역내라면 살아가는데 불편해도 위험하지는 않다. 그래서 요코하마 역이 악이면서도 악으로 비치지 않는다. 하지만 밖은 역이 증식할수록 그나마 남아 있던 땅이 침식되어 스이카 인증이 없는 사람들은 몰리고 몰려 바다에 빠져 죽을 판이다. 그래서 훗카이도와 후쿠오카는 역의 침식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다. 시코쿠는 무정부 상태가 되어 버려서 아비규환이다. 인간의 적은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참으로 적나라하게 던진다고 할까.(써 놓고 보니 시사하는 메시지가 네 개네)

 

맺으며: 단권이다.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를 넣는 바람에 독해력을 상당히 요구한다. 전문적인 용어도 많이 나오고. 한 3권까지 늘려서 집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히로토의 결사적인 여행이라던지 어느 병사와 인조인간의 만남 같은 현실적이면서도 직설적인 이야기 등 상당히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 아무튼 이 작품은 자유 없이 풍족하게 살 것이냐, 살기 위해 필사적인 자유를 원하느냐를 다루고 있다. 그 외에 설정으로 요코하마 역내를 표현한 SF적인 요소는 나름대로 큰 점수를 줄만 하다. 다만 등장인물들의 활약은 그렇게 많지 않은, 이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하는 설명이 주가 되고 인연은 크게 다루지 않는다. 여느 라노벨처럼 히로인이 나와 주인공과 연을 만들어가고 영웅이 되어 가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소년이 어쩌다 여행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본질에 도착하는 그런 이야기다. 주인공이라고 힘이 있는 게 아니고 지혜롭다고도 할 수 없다. 그저 맡은 바 임무를 다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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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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