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안 그래도 하루 벌어먹기도 빠듯한 미궁에서 난데없는 빨간색인지 뭔지 색상은 중요하지 않는 드래곤의 등장은 미궁 도시를 한바탕 뒤집어 놓았었습니다. 죽어도 부활은 가능하나 가챠 확률이라서 반드시 부활한다는 보장은 없는 복지 혜택으로는 누구도 감히 나서질 못했었죠. 뭐 어쩌겠습니까. 주인공 이알마스는 파티를 이끌고 드래곤에 도전을 했더랬습니다. 그 결과 얻을 건 얻고, 잃을 건 잃었죠. 뭔가를 얻은 사람은 덩치녀 벨카난과 잔반 가비지, 잃은 사람은 수녀 아이닛키(죽은 건 아님). 일반적인 몬스터 한 마리로도 생사가 오가는 미궁에서 드래곤의 존재는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드래곤과 한바탕 전쟁을 치른 후라서 그런지 주인공보다는 이번 4권은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시체 회수꾼으로서 친구 하나 없을 거 같았던 주인공을 그래도 같이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죠. 초중반은 그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데요. 어느 인물은 난다 긴다는 기사단 시절 미궁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 채 왔다가 지옥을 경험하고, 어느 인물은 살아남아 미궁에 대해 알아가고 파티원을 모으고 조금씩 적응해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들을 그리죠. 중반은 주인공을 뺀 아이들과 다른 파티의 아이들이 힘을 합쳐 던전에 들어갔다가 고생하는 이야기, 후반은 주인공도 합세해서 다시 도전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건 미궁은 애들 장난 형식으로, 소풍 가는 마음으로 들어갈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죠. 토끼라고 방심했다가 목을 물어 뜯겨 생사를 넘나들고, 몬스터가 쓴 마법에 화형 당하듯 구워지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본 작품은 드래곤볼식 휘황찬란한 마법이 오가는 이야기가 아닌, 로도스도 전기같이 고전적인 판타지를 지향하고 있죠. 작가의 다른 작품인 고블린 슬레이어와 유사한 세계라고 보시면 되는데요. 목숨을 걸어 겨우 몬스터를 없애고 보물 상자를 마주해도 걸려 있는 함정을 풀어야 하는 난제가 기다립니다. 많은 모험가가 여기서 희생되죠. 함정으로 걸려 있는 독침은 그나마 열쇠 따기(도적) 하나만 데려가지만, 지뢰같이 폭발에 휘말리면 파티 전원이 비명횡사하기 일 수입니다. 아이들이 주인공 없이 미궁에 들어갔다가 구워지고 폭발에 휘말리는 등 고생을 많이 하지만 이게 모험이라는 듯 겁을 먹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사뭇 진지하고 흥미롭습니다. 꼭 주인공이 있어야 모험이 성립된다는 클리셰를 벗어던지는 이야기라서 높은 점수를 줄만 하죠. 하지만 후반 주인공이 합류하면서 애들만 있는 파티와 주인공이 있을 때의 파티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진다는 느낌을 들게 하는, 역시 주인공이 있어야 한다는, 클리셰도 괜찮았습니다.

맺으며: 인생사 허무하다. 고블린 슬레이어에서도 그랬지만, 본 작품에서도 캐릭터에 대한 작가의 무심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문을 외우는 몬스터를 저지 못해 불벼락이 떨어져 구워진다든지, 보물 상자 열쇠를 따다 잘못 판단해서 파티가 궤멸될 뻔한다든지, 여담이지만 남녀평등하게 대우받는 게 특징이죠. 아무튼 그렇다고 완전 멀쩡해지는 회복술이나 물약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있긴 하지만 당장 좀 움직일 수 있는 성능에 횟수에도 제약이 따르죠. 그나마 이런 신관(고슬에서의 여신관처럼)은 굉장히 희귀하고 어찌어찌 있는 파티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없는 파티는 물어보나 마나 같은 이야기를 보여주는 게 본 작품입니다. 그만큼 빈곤한 삶을 보여주는 다크 판타지로서 꿈을 찾아 미궁에 들어가지만 꿈을 좇기도 전에 미궁의 밥이 되는 순환의 연속을 보여주죠. 그렇다 보니 인간애가 결여된 장면들도 제법 있습니다. 이번 4권을 예로 들어서, 모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모험가를 노리는 강도들, 같은 파티라도 쓸모에 따라 구분 짓고, 죽은 동료를 재료로 이용해 독이 있는지를 실험하고, 1권 때를 예로 들면 오를레아(히로인)가 당한 것처럼 누군가를 고기 방패로 쓰는 걸 마다하지 않는 쓰레기 등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모습들을 보입니다. 물론 모른 모험가가 그런 건 아니고 흥미로운 건 인간애는 버려도 인간을 그만두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는 것이죠. 미안해하고, 당연시 여기지 않는 것.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 죽은 동료를 들쳐 업고 신전에 던져주어 부활하기를 바라는, 부활 못하면 어쩔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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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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