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세계에서 용사가 된다는 건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일 겁니다. 사람들을 구하고 세계를 구하고 공주와 결혼해서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 누구나 꿈꿔보는 이상향이죠. 주인공인 이오리도 그런 부류였을 겁니다. 일본에서 이세계로 불려와 마왕을 무찔러 달라는 공주(?)의 부탁을 받고 동료를 모아 여행을 하였어요. 치열한 공방전 끝에 드디어 다다른 마왕이 산다는 마왕성, 난전과 일전을 벌이며 마왕을 타도하고 곧 세계의 평화를 목전에 두었죠.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로 마왕만 무찌르면 세계 평화는 올까? 그럼 오고 말고', 한때 그런 마음을 품었던 적이 내게도 있었어요.


동료들에게 뒤통수를 맞기 전에는 말이죠. 동화 같은 해피엔딩? 개나 줘버려요. 사람이 순진하면 눈뜨고 코 베이고 입에 들어가던 떡도 빼앗기는 게 현실의 잔혹함입니다. 주인공 이오리는 현실에서 아싸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순진하게 의심 없이 동료들을 너무 믿었고, 동료들은 그런 그를 속으로 비웃었죠.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세계 평화라는 꿈에 젖은 소리만 지껄이고 있었으니 동료들은 속으로 얼마나 웃었을까. 하지만 순진함은 죄가 아닙니다. 그걸 속이고 괴롭히는데 이용하는 놈들이 나쁜 것이죠. 이 작품은 아직도 진형형인 학교 왕따의 심각성을 꼬집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비록 학교와 클래스메이트는 아니지만, 용사와 동료라는 관계에서 그와 유사성을 엿볼 수가 있어요. 세계 평화를 부르짖는 용사를 부추기면서 속으론 '꼴에 용사'의 마음을 품고 언제든지 배신할 생각으로 가득했던 동료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용사를 이용하고 있었을 뿐이죠. 옆에서 부추기고 입바른 말만 하는 동료들의 말이 진심인 양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앞으로 나아갔던 용사의 결말, 죽고 나서야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여행을 하며 동료들이 했던 말은 그냥 입바른 말이었다는 것을 깨달아 버립니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용사와 동료들 중 누가 나쁘고 잘못 했을까요. 속은 용사? 속인 동료?


주인공 이오리는 두 번째 생을 부여받아 그런 동료들에 대해 복수를 진행 중입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마족에게 배신당한 전직 마왕 엘피와 함께요. 그전에 주인공 이오리는 잃어버린 힘을 되찾고, 엘피는 조각난 몸 파트를 되찾아 완성체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지만요. 그래서 이번에 맞이할 적은 한때 주인공 이오리의 검 스승이었던 귀족(오니) '디오니스'입니다. 그와의 싸움 자체는 예전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자주 써먹었던 궁지에 몰린 후 기사회생하는 주인공에 의해 개박살이라는 코스를 타고 있어서 크게 설명할 건 없고요.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주인공 이오리의 변해가는 성격이라 할 수 있어요.


이들은 전직 용사와 전직 마왕으로 만나 자신들을 배신한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처단한다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죠. 사실 이오리는 배신 당했다는 과거가 있다 보니 엘피에 대한 믿음이 있을 리 없었어요. 그럼에도 같이 여행을 하며 정이 들어버렸는지 주인공 이오리는 엘피에게 특별한 감정을 쌓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요. 엘피 또한 그런 그를 처음부터 의식 해왔고 배신하지 않겠다는 말까지 했던 그녀는 디오니스와 일전에서 궁지에 몰렸을 때 이오리를 살리려 무던히도 애쓰는 모습에서 엘피 또한 이오리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기 시작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게 하죠. 하여튼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이오리의 가슴에 적잖은 파장을 불러오기 시작합니다.


배신 당한 끝에 세상 온통 적 밖에 없다는 인식, 하지만 바로 곁에 자신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는 엘피와 첫 번째 생에서 구한 사람들의 덧없는 죽음 앞에서 그는 용사로써 돌아봐야 될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디오니스가 풀어놓은 마물에게서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카렌'이라는 여자의 모습을 보며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자기 만족을 위해 복수에 몸 담고 있었던 것뿐이지 않을까. 죽어가는 엘피와 만신창이 가 된 자신의 모습에서 지금 해야 될 것은 무엇일까. 저 가증스러운 디오니스를 어떻게든 무찌르는 것, 그때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온 엘피의 따스한 말 한마디...


인싸면 어떻고 아싸면 어떠하리. 순수하다 해서 욕먹을 일 없고, 세계의 평화를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라도 비웃지 않고 존중해주며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 옳은 일에 손뼉 치며 등을 떠밀어 주는 것, 용사라는 아싸가 인싸가되는 순간 세상은 빛으로 충만하리... 3권에 이르러서야 이오리는 복수만이 능사가 아닌 용사가 되어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대지에 발을 뻤습니다. 이걸 위해 나비는 고치가 되어 고된 겨울을 이겨낸 것일까. 디오니스와의 일전은 사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이오리와 엘피를 몰아붙이고 꼴에 시리어스를 부각 시킨다고 여러 가지 연출을 하지만 별로... 이오리의 각성은 한편으로는 눈물 날 것 같으면서도 중2병 같은 허세와 오글거림이 충만 그 자체로 다가옵니다.


맺으며, 복수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부각 시키는 에피소드였습니다. 복수에 눈이 멀고 어두워져 놓치고 마는 것도 있다는 걸 보여줘요. 주인공 이오리에게 있어서 그건 '엘피'가 되겠군요. 그녀의 무던히도 이오리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특공을 보고 있으면 과거 30년 전 그들에게 무엇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낳게 하더군요. 관련 복선은 하나도 없지만, 어쩌면 세상 단둘 밖에 없는 관계에서 외로움을 달래줄 인연을 소중히 하려는 것 같아 더 씁쓸하게도 하더군요. 그래서 그런지 갈수록 둘이 허물없는 관계를 보고 있으면 귀여운 커플이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개걸스럽게 뭔가를 먹는 엘피의 더러워진 입을 이오리가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모습이라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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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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