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처형소녀의 살아가는 길 2권 리뷰 -천진난만의 모습에 숨겨진 슬픔, 다시한번 만난 것에 기쁨-
상급 스포일러 주의, 긴 글 주의
이것은 이세계 소환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마왕을 무찔러 달라고 소환된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세계에는 별과 지맥의 영향으로 이세계에 흘러드는 다른 별의 사람이 있다. 사리사욕을 위해 소환되는 사람도 있다. 결과 지구인은 이세계인들로 인해 언제나 고통을 받는다. 미완성인 인격의 학생들이, 평범했던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던 세상과 동떨어진 세계에 떨어져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세계로 불려와 흘러가야 한다면.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커져가는 고향의 그리움과 가족과 친구를 만나고 싶어 하는 애틋함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세계는 지구가 아니다. 모습은 비슷해도 본질적으로 같은 인간은 아니다. 그러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든 세계에서 그저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게 죄인가를 물었을 때, 그것이 죄라고 한다면 이세계가 어찌 되든 내 알 바는 아니게 된다. 1천 년 전 그렇게 4대 재앙이 탄생했고, 이세계는 전멸이라는 수순을 밟게 된다.
메노우는 아카리를 죽이기 위해 들렀던 고도 가름을 떠나 다시 정처 없는 여행길에 오른다. 아카리는 죽지 않는다. 그녀의 능력은 [회귀], 목숨이 끊어진 순간 그녀의 시간은 역행하여 가장 안전한 곳에서 재시작하게 된다. 이세계는 1천 년 전의 교훈을 받아들여 교회를 필두로 이세계로 넘어오는 지구인을 철저히 수색하여 배척하는 일을 하고 있다. 메노우는 처형인으로서 그 선봉에 서 있다. 아카리는 교회에 대항하여 어느 왕족이 저지른 소환에 의해 이세계로 소환된다. 소환은 금지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왕족이나 되는 사람이 소환식을 거행했던 이유는, 지금에서야 생각났는데 1권에서 이미 복선이 투하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이세계 체재는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걸. 너무나 힘이 커져버린 교회와 문답 무용으로 지구인을 배척하는 시스템이 옳은가를 묻기 시작한다. 아카리는 그 대답의 하나로 소환되었다. 왜냐면, 지구인은 이세계로 넘어오면서 강대한 힘을 소유하게 되고, 그걸 이용하면 정체된 세상을 타파할 수 있으니까.
여기서 불합리가 존재한다. 지구인은 이세계로 넘어올 때 능력을 받게 되고, 이 능력은 쓰면 쓸수록 사수의 영혼과 기억을 소모시킨다. 영혼과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내가 나로 있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능력은 지구인의 의식과 상관없이 존재하게 되고, 영혼이 갈려 나가고 기억을 모두 잃게 된 사수는 능력에 따른 행동만 되풀이하게 된다. 요컨대 사수가 죽어버린 기관총이 총알을 무한대로 공급받으면서 제멋대로 갈겨된다고 보면 된다. 사실 이 부분은 작중에서 보다 고차원적인 설명으로 이뤄져 있으나 상세한 설명은 귀찮으니 생략하도록 하자. 그래서 이세계는 지구인을 보는 족족 처형해 나가고 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사상자는 끝도 없이 나올 테니까. 그 발로가 세계를 멸망 직전까지 이끌었던 1천 년 전 4대 재앙이다. 하지만 능력을 쓰지 않으면 영혼과 기억은 소모되지 않는다. 즉, 지구인을 교육해서 능력을 안 쓰게 하면 재앙은 오지 않는다는 아주 심플한 해결책이 있음에도 이세계는 그러지 않는다. 반대로, 지구인을 이용하면 이세계는 멸망한다. 그럼에도 소환에 주저하지 않는 것에서 알마나 이세계가 부조리로 정체되어 있는지 잘 나타내고 있다.
아카리는 지구인이다. 그녀의 능력은 [회귀]다. 그녀가 능력을 행사해서 기억과 영혼 모두 소모되었을 경우 이세계에 미칠 파장은 계산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메노우는 그녀를 죽이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항구도시 '리벨'이다. 4대 재앙 중 하나인 '무마전'이 존재하는 곳이다. 1천 년 전 기억과 영혼을 모두 소진해서 순수한 능력 마(魔)가 되어 버린 '지구인 소녀'가 봉인된 곳이다. 보통 여느 라노벨이라면 魔가 되어버린 소녀를 구출해서 동료로 받아들여 여행을 떠나는 클리셰를 보여줬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런 거 없다. 어디까지나 순수 능력만 남아버린 지구인이 어떤 짓을 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순수한 능력은 그 능력만으로 움직이기에 컨트롤은 불가능하다. 메노우는 아카리를 魔가 봉인되어 있는 무마전에 같이 봉인 시키려 한다. 하지만 한가지 그녀(매노우)의 마음에 뭔가 걸리는 것이 있다. '죄악감'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아이를 죽이는 것에 오는 반발, 원래 처형자의 일을 하도록 철저히 훈련받은 그녀가 이런 마음을 가질 리가 없다.
이렇듯 메노우는 처형인으로써 본분을 다하고자 아카리를 죽이려 애쓴다. 개그나 코믹풍이 아닌 정말로 시종일관 사람이 예사로 죽어나가는 시리어스하고 진지한 장면을 그려간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카리는 매우 밝은 모습으로 메노우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며 정신 사납게 한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듯, 지금의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는 듯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게 상당히 애틋하게 다가온다. 그런 아카리를 보며 메노우의 마음은 점차 처형인으로서의 존재 의문과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죄악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원래는 처형인에게 있어서 불필요한 감정들이다. 이러한 감정에서 이 작품의 또 다른 포인트 억압이 대두된다. 세계를 위해서라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 그것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야 하는 본말전도 같은 행위가 정당하고 올바른 세계인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그래서 거기에 대항하는 조직도 생겨난다. 뭉개지지만.
이번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마논 리벨'이라는 서브 히로인의 어머니다. 지구인으로서 정식 소환이 아닌 흘러들어와 이세계에 정착했고, 교회의 눈을 피해 리벨 항구를 지배하는 귀족에게 거둬들여져 딸 마논을 낳게 된다. 어머니 또한 능력을 받았지만 힘을 철저히 숨긴 덕분에 어머니는 기억과 영혼을 잃지 않게 된다(이게 포인트다). 마논을 낳은 후 행복하게 이세계에서 살아갔다면 아마 이번 2권의 이야기는 성립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꿈과 희망이 없다. 몸은 이세계에 있어도 마음은 지구에 가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애틋한 감정을 들게 한다. 이렇듯 감정에 관련해서 제법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할까. 그래서 이번 이야기의 중추로 딸 마논 리벨이 메노우와 아카리를 막아서며 위에서 물었던 답을 요구하게 된다. 교회만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죽지 않아도 되었고, 지구인을 어머니로 둔 자신도 기대를 받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망가져버린 마논의 자유를 그리는 게 상당히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리고 무마전에서 삐져나온 만마전(魔가된 소녀)과의 싸움은 지구인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부각시켜간다. 악은 지구인?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지구인들을 죽여가는 교회가 악? 사실 4대 재앙도 처음엔 평범한 지구인이었다. 그저 이들은 지구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아카리는 무사히 죽을 수 있을까. 이미 그녀도 기억과 영혼의 소모가 극심하다. 아카리의 소원은 메노우를 살리는 것. 그럴수록 메노우의 목을 죄는 아이러니가 어우러져 이야기가 상당히 재미있게 흘러간다. 그러고 보니 1권 표지에서 메노우가 시계를 들고 있던 의미를 새삼 알게 된다. 스포일러라 자세히 언급은 힘들지만.
맺으며: 사실 이 작품은 스포일러를 하지 않으면 리뷰 쓰기가 어려운 작품에 속한다. 아카리의 목적을 알아야만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할까. 사실은 메노우가 아카리를 죽이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 아닌, 아카리가 메노우를 살리기 위해 여행을 하는 거라는 조금은 복잡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거기에 싫든 좋든 계속 넘어오는 지구인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이세계가 멸망해버릴 거라는, 그래서 교회의 지구인 사냥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데 알고 보면 그게 또 아니라는 복선이 깔려 있다. 그런 의문을 느껴가는 메노우의 목숨이 풍전등화가 되고, 아카리는 그런 메노우를 살리기 위해 여행과 회귀를 하는데 기억이 자꾸만 소모되어서 내가 나로 있는 게 불가능해진다는 것의 안타까움도 있는 등 이야기가 좋은 뜻으로는 알차게 구성되어 있고, 나쁘게 말하면 난잡하다는 느낌이 있다. 그래서 메노우와 아카리 말고도 모모등 여러 히로인들이 나오는데도 언급할 여유가 없다. 다른 히로인들에 대해선 차후에 다시 언급하겠다.
어쨌거나 이 작품은 필자가 추천하는 작품이다. 여느 이세계물이 정도의 길을 걷는다면 이 작품은 사도의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다. 나쁜 의미가 아닌, 지구인이 이세계를 구하는 게 아닌 이세계를 파멸로 이끈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세계 사람들은 지구인과 어떻게든 공존을 모색하는 것도 아니다. 보는 족족 다 죽여버리니까. 그런 와중에 지구인 소녀를 주운 처형인이 같이 여행을 하며 이세계의 의문을 깨달아가고 반기를 드는 게 아닐까 하는 이야기다. 요 부분은 조금 클리셰적이긴 하지만. 이번 2권에서는 그 전조가 조금 드러난다. 무마전에 봉인되어 있는 순수 魔의 소녀에 의해 누군가의 의지 아닌 나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 할까. 그리고 아카리가 회귀하면서도 아직 자기가 실아 있는 것에 의문을 느껴가고 조금식 그 의문에 접근하면서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이 있다. 다만 독해력을 꽤 많이 요구한다는 단점이 있다. 사실 필자는 절반도 이해 못했다. 그러니 리뷰가 두서없어도 양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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