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들어주는 알라딘의 마법 램프가 있다. 치면, 무엇부터 소원을 빌까. 젊음을 되찾고, 부자가 되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면, 사람마다 소원은 가지각색일 것이다. 어느 날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가 툭 떨어진다. 선량한 사람이라면 정의로운데 쓸 것이고, 불량한 사람이라면 사리사욕이나 범죄에 쓸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부모님의 목숨을 구하는데 소원을 빈다.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쫓기던 부모님은 아들을 숨겨놓고 미끼 역할을 하였으나 아무래도 부모님은 능력적으로 평범한 사람이었나 보다. 그래서 주인공은 눈앞에 나타난 '엑센트리 박스'에게 소원을 빌어 부모님을 쫓던 사람들을 물리친다. 하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원하는 게 있으면 대가가 따른다. 주인공에게 있어서 부모님을 구한 대가는 인간으로서 구성해야 될 무언가 중 하나였다.

 

마치 강철의 연금술사처럼 등가교환을 연상시킨다. 소원을 빌 때마다 인간이 가진 구성요소, 가령 희로애락이라던지 슬픔 등 감정과 사고 패턴, 습관을 하나식 빼앗긴다. 이렇게 하나식 빼앗기다 보면 나중엔 껍질만 남은 인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으로 직결된다. 그렇다면 이런 중요한 구성요소를 빼앗겨가면서 주인공은 무슨 소원을 빌까. 사람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고, 악에 맞서 싸우는 등 정의를 위해 소원을 빌까? 주인공 하기 나름으로 미국 영화 어벤저스처럼 그런 활약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장면들은 보여주지 않는다. 히어로란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닌, 내 주위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손길을 내미는 것으로도 히어로는 될 수 있다. 가령 치한에 쫓기는 여자를 구해준다던지, 담뱃불이 떨어져 발등에 화상을 입은 사람을 치료해준다던지...

 

어이가 없을 수도 있겠는데, 사람의 정의(正義)란 누군가의 잣대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정의(定義) 되지도 않는다. 자신의 구성 요소를 잃어가면서 타인을 도와주는 것에 동정은 보낼 수 있어도 비난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최소한 나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까.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이 작품은 그런 거창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 소원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내가 나로 살아가는 이유를 그냥 구구절절 풀어놓을 뿐이다. 소원을 빈다는 건 등가교환이다. 내가 나로서 있기 필요한 구성요소가 빠지는 동시에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서 내 기억이 지워진다. 주인공은 부모님을 구해준 대가로 부모님의 기억에서 나의 기억은 사라졌다. 아버지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자기 집에 있는 게 못마땅하여 죽도록 팬다. 그리고 아들을 남겨둔 채 이사 가버린다.

 

​그러니까 하나의 소원에 두 가지를 잃게 된다. 주인공은 부모님을 구하면서 기억 말고도 '타산'을 빼앗겼다. 남을 구하는데 있어서 타산이 빠지게 되고 그렇다 보니 도와주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은 없다. 그럴수록 주인공이 가진 구성요소는 하나식 없어진다. 주인공은 그렇게 사람을 도와주고 구하면서 미각을 잃고, 공복감을 잃고, 사고 패턴을 잃어간다. 여기서 하나 흥미로운 것, 그렇다면 주인공의 구성요소를 누가 빼앗아 가는 것일 것이다.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엑센트리 박스'에서 튀어나온 12살짜리 소녀다. 주인공은 그녀에게 '스크램블'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스크램블은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에 보유자의 인간이 가진 구성요소 중 하나를 가져간다. 이렇게 주인공이 구성요소를 잃어갈수록 스크램블은 인간에 가까워진다.

 

주인공은 뭣 때문에 구성요소를 잃어가면서까지 타인을 도우는 것일까. 작품은 소원보다 주인공의 행동에 많은 초점을 맞춘다. 주인공은 살아가는 의미이자 이유를 사람을 도우는 데서 찾는다. 맹목적이고 집착에 가깝다. 그 끝에 기다리는 건 빈 껍질이라는 종말임에도 개의치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돕는데 이유가 필요한가?라는 메시지를 던진다고 할까.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런 거창한 건 들어있지 않다. 그저 읽는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무언가만 있을 뿐이다. 소원을 빌지 않으면 구성요소가 빠질 일은 없다. 소원이 없어도 사람은 충분히 도울 수 있는 레벨의 일만 일어난다. 그렇잖은가. 발등에 떨어진 담뱃불을 치료하는데 화상 치료제만 있으면 될 테니까 말이다. 치한에 쫓기는 여자가 있다면 경찰을 부르던가 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소원을 남발해 자가 지신을 죽여가는 주인공에게 도통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이미 부모님을 구할 때 타산을 빼앗기고, 그렇게 망가지기 시작하여 결국 부팅 프로그램이 소실된 컴퓨터처럼 바탕화면엔 들어오지 못하는 무한 부팅만 해대는 주인공만 남았다 뭐 그런 이야기 같다. 모순덩어리다. 소원을 빌 때마다 구성요소가 빼앗겨 간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원이 없으면 해결 못한 사건들도 아니다. 자기 자신을 죽여가며 남을 도우고, 그렇게 망가져 가면서도 뭔가 바뀌려 하지 않는 주인공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모순을 발견했지만 이번엔 모순을 없애기 위해 죽어 버리겠다고 나선다. 자신의 기억하는 사람들에게서 기억을 지우려 하고, 그것으로 인해 타인이 받을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미 그런 감정은 잃은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맺으며: 이 작품처럼 짜증을 불러온 작품도 없겠다. 글을 풀어 놓는 것에 독자들의 독해력은 안중에도 없다. 마치 덜 익은 현미밥을 먹는 듯 밥알이 따로 논다. 뭔가 온갖 미사여구는 다 갖다 붙여 놨는데 뭔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필자가 600권이 넘어가는 라노벨을 읽어오면서 이렇게 자기 멋대로인 작품은 처음이다. 결국 요점을 찾아보면 사람이 사람을 돕는데 이유가 필요하나?이고, 그로 인해 내가 뭘 잃든 상관하지 말아 줘라는 게 포인트다(아마도). 뭔가 큰일을 하면서 구성요소를 빼앗겨 간다면 개연성이라도 있을 텐데, 고작 발등에 떨어진 담뱃불을 치료해주고 구성요소를 빼앗긴다. 정말로 개연성이 하나도 없다. 주변에서 잊혀 간다는 것, 내가 나로 있지 못한다는 두려움도 없다. 그저 잊히기 위해, 남을 도주는 것에 삶의 이유를 찾는, 그저 자///살 지망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필자가 이 작품이 전하는 의미를 전혀 이해 못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풀어내봐야 이해는 해도 공감하는 사람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제목의 루시는 누구냐. 1권에선 나오지도 않는다. 1권이라는 걸 보면 2권도 나온다는 소리인데 솔직히 이런 작품은 정발 안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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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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