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아저씨의 옛 동료 찾기도 종반으로 향한다. 그 옛날 마물에게 다리를 물어 뜯겨 모험가로서의 생명을 잃게 된 아저씨는 폐가 될까 파티 동료들에게 말도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었다. 이것이 못내 가슴속 상처로 남아 있던 아저씨는 늦게나마 동료들을 찾아 사과하고 묶혀 두었던 응어리를 풀고자 한다. 사실 동료들은 그가 모험가로서 생명을 잃었다고 해서 쫓아내진 않았을 것이다. 우정이란, 유대란 그렇게 가볍지가 않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어린아이들이 모여 파티를 짜고 노력을 하며 모험가로서 조금식 인정받아 가던 세월. 티격태격 하면서도 서로를 챙겨주고, 감싸주고, 보호해줬던 이들의 관계는 아저씨가 없어진 후, 죄책감에 파탄을 맞이하게 된다. 동료들은 아저씨의 다리를 고쳐 주겠다며 세계를 돌아다니고, 다리를 물어뜯은 마물을 잡겠다고 자신을 혹사하지만 다 부질없는 일, 동료들은 폐인의 길을 걷고 있었다.

 

[대지의 배꼽]에서 '카심'에 이어 두 번째 동료 '퍼시벌'과 해우하게 된 아저씨는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게 된다. 파릇파릇하던, 머리에 피도 안 말랐던 애들이 어느새 흰머리 히끗히끗한 중년을 넘어서고 있다. 여기서 눈물 콧물 쏘옥 빼는 상봉씬을 찍어도 좋겠지만 그럴 나이는 이미 지났다. 중년 아저씨들의 커뮤니케이션은 주먹다짐이 정석이니까. 이것은 곧 혈기만은 젊은이 못지않게 아직 왕성하다는 뜻이기도 하. [대지의 배꼽]에서 솟아 나오는 마물과 최전선에서 마주해도 끄떡없는 진면모도 보여준다. 그 옛날에도 이렇게 서로 등을 맞대고 싸웠으리라. 아저씨는 긴 여행의 피로에 몸져 누우면서도 다시 옛 시절로 돌아간 듯한 생활은 싫지만은 않다. 이것도 아빠의 일이라면 뭐든지 하려는 딸아이(안젤린)가 등을 떠밀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제 남은 한 사람, 엘프(여성) '사티'만 찾으면 된다.

 

그 '사티'는 어디에 있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녀가 판타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미목 수려한 엘프라는 것이고, 옛날에 파티를 짜고 있을 때 아저씨랑 매우 친했다는 것이다. 안젤린은 아빠에게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남몰래 내 엄마가 되어 줬으면 하는 플래그를 세우기도 했다. 이번에도 동료들이 아저씨를 띄워주며 또 플래그 세우기도 한다. 그래서 그럴까 앞선 중년 아저씨(동료) 둘을 찾고 해우할 때와는 다른 분위기를 띈다. 라노벨이든 일반 소설이든 읽다 보면 어느 히로인에게서 주인공과 맺어졌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딱 '사티'가 그런 분위기를 뿜는다. 이전까지 안젤린이 여러 성인 여성을 만나 엄마가 되어줘라며 영업을 했을 때도 이런 느낌의 히로인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히로인은 항상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사티'는 쫓기고 있다. 그녀는 쌍둥이 자매를 보호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세계에는 마왕이 존재한다. 이 작품에서 마왕이란, 정신이 '백지' 상태인 호문쿨루스다. 호문쿨루스는 그 옛날 신(神)과 싸웠다는 '솔로몬'의 유산이다. 이 작품은 부녀(父女)의 유대와 가족애를 다루는 동화 같은 이야기인 것과 동시에 마왕이 등장하는 판타지를 그린다. 이 작품에서 마왕은 나쁜 뜻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안젤린의 고향에 있는 '미토'는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인간의 감정에 상처를 받는 인간과 똑같은 아이로 성장하고 있다. 이전에도 이와 관련 리뷰를 한 적이 있는데 마왕을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이 작품은 역설하고 있다. 그렇담 마왕은 어디서 오나. 그 이야기가 이번 8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솔로몬과 72명의 마왕'을 추앙하고 연구하는 집단(이후 흑막).

 

흑막은 호문쿨루스(갓난 아이)를 세상에 뿌려놓고 관찰 중이다. 마왕이 될지 인간이 될지, 그대로 소멸할지. 그리고 나아가 인간의 몸에 호문쿨루스를 심어 태어나게 하는 실험도 하고 있다. 인륜을 저버리는 실험이기에 흑막은 이 작품에서 악당으로 등장한다. '사티'가 보살피는 쌍둥이 자매는 미토와 안젤린과 똑같은 머리색을 가지고 있다. 사티는 솔로몬의 유산인 호문쿨루스를 이용하려는 흑막과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이미 아저씨와 안젤린은 미토라는 마왕을 보살피고 있고, 나쁜 길에 빠져든 마왕을 물리친 적이 있다. 그렇기에 사티가 쫓기고 있다는 걸 알아가면서 이야기는 차츰 극적으로 바뀌어간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쌍둥이 자매가 참으로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인다는 거다.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어서 항상 새로운 것에 흥미를 보인다. 

 

그리고 미토 다음으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 흐르게 된다. 자매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해 엄마가 죽은 걸 자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엄마, 여기에서 자", "되게 잠꾸러기야, 언제 일어나는 걸까"하는 장면은 보는 이를 가슴 아프게 한다. 작가는 부녀의 이야기를 그리며 훈훈한 장면을 연출하다가도 이렇게 가슴을 옥죄는 장면도 서슴없이 집어넣는다. 안젤린과 아저씨는 사티와 쌍둥이 자매를 구할 수 있을까. 여느 때 같으면 실력으로 다 몰살 시켜 가겠지만, 흑막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스케일이 장난 아니게 커지게 된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던 아저씨가 대처하기엔 너무나 강대한 적(에너미)이다. 하지만 중년이지만 아직 쌩쌩한 아저씨 동료들이 있고, 안젤린도 있다. 사티에겐 천군만마를 얻는 거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 아저씨 일러스트와 더불어 "지금, 모험이 시작되려고 한다."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과거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 시작한 여정은 이제 곧 끝난다. 카심과 퍼시벌과 사티는 과거 아저씨의 동료들은 저마다 믿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싸워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그러니까 아저씨도 무언가를 지키기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모험가의 길을 걸으려는 아저씨의 위풍당당한 모습. 쌍둥이 자매부터 시작해서 후반 부분은 뭐하나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필력을 보여준다. 

 

맺으며: 다시금 살아난 사물과 주변 환경에 대한 표현력이 대단하다. 특히 산야를 표현할 때는 마치 거기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이래서 이 작품을 끊지 못한다고 할까. 아무튼 이번 사티의 에피소드도 그렇고 아저씨의 결의도 그렇고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사티와 아저씨와 안젤린의 장면을 교차 시키며 이들을 언제 만나게 해줄까 하는 두근거림이 있다. 그 사이를 흑막이 파고들어 사티가 위기에 빠져들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아저씨와 안젤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이야기는 매우 흥미진진하게 흘러간다. 9권에서 결말이 날 거 같은데 언제 나오려나. 이렇게 후속권이 기다려지는 작품은 오랜만이다. 그건 그렇고 또 새로운 히로인이 추가된다. 9권에서 계속 언급되면 그때 리뷰에서 다뤄보겠다. 나름대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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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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