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주의

여전히 귀족원(귀족들만 가는 학원)에서 빼어난 실력으로 최우수를 따내며 종횡무진을 펼쳐가는 '마인(이하 여주)'은 다른 영지(領地)를 끌어들여 의식(儀式)에 관한 연구와 그에 따른 가호(加護)의 실험을 하며 바쁘게 지냅니다. 그 와중에 주인공 버프로 여주는 엄청난 가호를 받는 건 덤이고요. 하루라도 얌전히 지내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지 그토록 멀리 하라 했던 왕족들과 어울리고, 어떤 의식을 치르면서 마력이 폭주해 반짝반짝 온몸에서 네온사인이 뿜어져 나오는 무녀가 되어 사방팔방 성녀 전설을 더욱 퍼트리는 통에 보호자인 페르난디드의 이마에 핏대는 가실 날이 없고, 양부모의 위는 더욱 쪼그라들기만 합니다. 거기에 여주는 정변으로 소실된 왕(王)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증표가 있는 곳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인물이기도 해서 페르디난드는 전전긍긍, 페르디난드가 왕의 서자가 아닐까 하는 복선까지 합쳐져서 만일 여주가 증표를 손에 넣는 날에는 피바람이 불게 되겠죠(페르디난드가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측면에서). 정변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왕은 정통 후계자가 아니라는 의심을 받고 있어서 왕의 증표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거든요.

이번 이야기는 페르디난드는 왕의 증표(전문 용어 있지만 어려워서 패스)에 다가가지 못하게 여주를 단단히 단속하려 하지만 그게 통할 리 없다는 것과 길베르타 상회 '벤노'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현장을 그립니다. 페르디난드가 왕족과 어울리지 말라고 하는 건 그와 그녀(여주)가 속한 영지 에렌페스트는 왕족이 기침만 해도 훌렁 날아가 버리는 약소 영지라서 고삐 풀린 망아지(여주)처럼 미쳐 날뛰다 왕족의 심기라도 건드리면 여주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죠. 거기에 왕족은 사라진 왕의 증표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어서 지금은 하나라도 많은 정보를 얻으려 하고, 마침 도서관 지하 숨겨진 서고에 그 증표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는데요. 그 서고의 열쇠 관리인이 하필 여주. 페르디난드는 죽어도 지하 서고엔 가지 말라고 해두었지만 왕족의 명령은 신(神) 다음으로 지엄해서 훅 불면 날아가는 영지의 영주 후보생(여주)에게 거부할 권리 따윈 애초에 없었죠. 웃긴 게 이미 여주는 여주의 마력으로 왕의 증표 일부분을 구현 시킬 수 있다는 것, 왕족이 이걸 알면? 이게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점은 여느 판타지 작품처럼 친구 같은 왕족, 친구 같은 귀족(여주는 친구같이 지내지만) 아니라 실제 중세 시대나 조선시대같이 왕족과 귀족의 권력은 절대적이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가족이라도 서로 호위 기사를 두며, 먹을 것도 독이 없다는 증거로 내가 먹어보고 상대에게 권하는 세상이죠. 귀족은 평민을 사람으로 안 보고, 영주의 자리를 놓고 친자식들 간 경쟁을 하며, 왕족은 정변을 일으켜 왕좌를 찬탈하는 실로 판타지 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중에 필자가 가장 큰 점수를 주는 부분은 위생 상태와 영아 사망률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부분이군요. 여주는 이세계에 전생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길거리에 널려있는 똥과 그에 따른 냄새, 길거리에 파는 식재료의 위생 문제, 집돼지를 잡는 모습 등에서 졸도를 하기도 했죠. 옷은 누더기를 기워 입고, 7살이 넘으면 자신의 앞가림을 해야 하며, 문맹률은 매우 높습니다. 그나마 한 3부 넘어오면서 이런 점은 다소 누그러들었긴 합니다만, 여전히 암살과 납치가 횡행하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선 남을 끌어내리는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들을 보이죠.

아무튼 이번 5부 2권의 핵심이 되는 이야기를 언급해 보자면요. 초창기 1부 때 길베르타 상화 '벤노'가 처음 여주의 가치를 알았을 때 필사의 각오로 여주의 정체를 숨겼었죠. 벤노를 떠나 페르디난드에 거둬진 후에도 그(페르디난드)가 정보 규제를 해주었고, 이후 영주의 양녀가 되면서 영주도 어느 정도 정보를 숨겼기도 하였는데요. 그 이유는 권력자들로부터 여주를 지키기 위함이었죠. 영주의 양녀가 되기 직전 납치될 뻔하였고, 그로 인해 친가족과 헤어지게 되었으면 자신의 가치라 얼마나 큰지 알아야 되지 않을까. 이 부분이 이 작품에서 유일한 옥에 티로 다가옵니다. 이 작품의 여주는 배움이 없는 거죠. 그만큼 책(모든 사건의 발단)에 환장하고 있다는 아이덴티티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결국 이번 5부 2권에서 여주의 가치는 약소 영지에 놔둘 인물이 아니라는 상위 영지의 영주 후보생이 여주를 빼앗으러 오면서 결국 우려한 일이 터지고 맙니다. 문제는 왕족까지 연루되는 이런 큰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여주는 사과나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그랬죠.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사과와 반성은 뒷전으로 밀려나서 좀 거식하더라고요.

맺으며: 하얀 가루를 이 작품에 비유하자면 책입니다. 여주는 책을 무척 사랑하죠. 그래서 쩝쩝 맛을 봅니다. 그리고 중독되어 끊지도 못하고 사방팔방 하얀 가루를 뿌려대죠. 뒷일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꽃(책)을 피우면 보기 좋잖아? 그래서 미친 듯이 다른 영지에 인쇄 기술을 퍼트리고 다 같이 길동무로 삼아 가죠. 책이 퍼지면 문맹률도 낮아지고 모두가 책(꽃)을 보면 얼마나 좋아? 뒷감당은 남에게 다 떠넘기면서. 그로 인해 자신이 속한 영지가 얼마나 위험해지는지(약소 영지 따위 밟아 버리고 기술을 빼앗자), 자신의 행동(고삐 풀린 망아지)으로 인해 다 같이 사이좋게 단두대에 올라설 수 있다는 자각도 없이, 이번에 왕(王)을 알현하면서 평소대로 하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다는 걸 알게 되죠. 현실 지구에서 20살쯤까지 살았으니 왕이나 이웃집 아저씨나 다 똑같은 사람인걸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삼족이 멸족 당하고도 남았겠지만 그녀의 가치(신문물, 인쇄, 마력, 성녀) 때문에 살아 있다는 걸 여주만 모르고 있다 할 수 있는데요. 이래서 기술을 배워야 하나 봅니다.

상위 영지가 여주 빼앗으려는 장면들은 좀 갑작스러웠지만 꽤 흥미진진합니다. 권력은 이런 거라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그렇다고 마냥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듯 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오징어 게임의 줄다리기처럼 지혜롭게 헤쳐나가는 장면들이 흥미롭죠. 다만 이런 흐름까지 오게 된 원인이 여주에게 있음에도(주변의 통제를 듣는 둥 마는 둥)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다소 실망스럽기도 합니다. 왕의 증표는 아직 떡밥만 흐르고 본격적으로 언급되는 건 한참 지나야 되지 않을까 싶군요. 이번 5부 전체의 주된 이야기가 되는 만악의 근원 아렌스바흐의 실질적 권력자가 된 '게오르기네(여주에겐 고모쯤 되려나요)' 관련해서는 골방에 틀어박혀 뭔가 꿍꿍이를 펼치는 복선이 투하되고 중앙 기사단이 애들 노는데 들이닥쳐서 여주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게 슬슬 뭔가 터질 거 같은 분위기를 뿌려댑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있었던 여주 납치 미수 사건 이면엔 고모가 자리 잡고 있기도 했죠. 아무튼 이제 여주는 어느 정도 자라게 되어 귀여움은 거의 없어져 버렸군요. 페르디난드가 데릴사위로 떠나면서 둘이 보여줬던 캐미도 많이 줄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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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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