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고블린 슬레이어를 주축으로 해서 출연진 모두 모여 왕도에서 열리는 마상창 대회 구경 왔습니다. 촌놈들이 도시로 와서 들떠 우와! 우와! 거리며 여기저기 기웃기웃 쇼핑을 즐기고 있는데 도시 분위기는 밝지만, 어딘가 모르게 상당히 숨이 막힙니다. 여신관과 엘프 궁수는 모자 파는 곳에서 꺄악! 거리며 모자를 고르고, 써보는 등 쇼핑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불숙 어느 귀부인의 호통소리가 들려옵니다. "엘프라서 부끄럽다고 귀를 숨기지 마세요". 이번 이야기는 자기들의 잣대로 차별 타파를 외치는 PC(political correctness)주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거의 가상 공간의 캐릭터에만 국한되고 있지만, 사전적 의미는 모든 것에서 차별과 편견을 없애는 것이 올바르다는 걸 의미하죠. 사실 편견과 차별을 없애는 건 맞지만, 그로 인해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없어지는 걸 경계해야만 하죠. 왜냐면, 뭐만 했다면 가령 아이가 밥투정을 하는데 나무라거나 다독이는 것조차 너, 아이 차별하냐?라는 말을 듣게 될 테니까요.

본 작품에서는 엘프라서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귀를 숨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개성으로 써보고 싶은 것뿐인데?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고 과언이 아닌 켄타로우스에게는 불쌍하다고 달리지 말라고 합니다. 수인 전용 의자를 만드는 건 인간보다는 수인을 차별(어째서) 하는 거라고 합니다. 무녀가 신을 봉양하며 춤을 추는 건 그녀들이 바라지 않는 일일 것이라며 금지해야 된다고 합니다. 웨이트리스는 서빙을 해선 안 된다고 합니다. 여자를 구경거리로 만드니까? 그러해서 이것도 저것도 다 차별이니까 해선 안 된다. 신청서를 대신 써주는 것도, 체급별 시합도, 도둑놈에게 도둑이라 말하는 것도 다 차별, 중세 판타지가 무서운 점은 정의를 자처하는 쪽에서 내가 하는 말이 정의이고 반대하는 쪽은 악(惡)으로 단정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이번 16권에서 정의는 지고신을 모시는 성기사라는 것에서 질이 매우 안 좋게 흘러가게 되죠.

참, 미리 변명을 써놓는다는 게 깜빡했군요. 말씀드리지만 작가의 성향이 그렇다거나 그렇다는 게 절대 아닙니다. 현실에서 차별을 없앤다면서 되레 개성과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PC주의의 폐해를 담고 있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사실 PC주의가 옳다 그르다를 개인이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PC주의는 많은 이들의 지탄을 받는 건 사실이죠. 물론 작가도 그런 의도를 가지고 집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후기에도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온전히 독자의 몫이고요. 아무튼 이야기는 차별이랍시고 개성을 죽이고, 불편을 초래하고, 다른 이를 배려한답시고 이쪽을 차별하는 역차별이 생기지만 현실에서도 그러하듯 역차별에 대한 폐해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을 보이며 내가 차별을 없앴어!! 하며 뿌듯해하는 장면들이 대단히 압권입니다. 어쩜 이리도 현실 반영을 잘 해놨는지 혀를 내두룰 정도였군요. 참고로 비꼬는 게 아니라 감탄사입니다.

아무튼 시작은 마상창 대회 구경이지만 역시나 사건이 터지게 되는데, 왕매(왕의 여동생)가 저주에 걸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왕매는 이전에 고블린에게 납치되었다 고블린 슬레이어에게 구출된 적이 있었죠. 그래서 그 사건으로 인해 이들은 매우 친해졌고, 그러해서 못 본척할 수도 없고,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가는데 약간은 코믹적인 요소가 가미됩니다. 그중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점은 여신관인데, 왕매와 여신관은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 닮았다는 것이고, 왕매가 저주에 걸렸다는 걸 알려선 안 되기에 여신관이 왕매 대타역을 맡아 돌아다니며 꼬물꼬물 거리는 게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고블린 슬레이어와 같이 다니며 산전수전 다 겪은 여신관으로서는 이쯤이야. 사실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번에 좀 보상받는다고 할까요. 더욱이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는 만인을 호령하는 모습에서 그녀의 눈부신 성장을 엿보이기도 하고요.

맺으며: 이번 이야기는 사건보다는 현실 PC주의를 큰 비중으로 다룬다고 하겠습니다. 비판이라기보다는 그 폐해를 보여주고 있죠. 그리고 그 폐해는 좋게 끝나지 않는다는 메시지도 던집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어째서 내가 차별받는다는 걸까 하는 것도 있고요. 달리는 게 좋아서 달리는 달리기 선수에게 불쌍하니까 달리지 말라고 하는 건 올바른 배려일까. 바니 걸 의상 입고 서빙하는 것을 좋아서 하는 일인데 이걸 두고 성 상품화라며 금지해야 된다면, 100보 양보해서 성 상품화이고 그래서 그만두게 되었다면 그 여성은 무얼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해서 벌어 먹고 살아야 할까. 금지해야 된다는 사람 왈: 자유롭게 골라서 하면 되지 않을까? 이런 장면들을 보고 정말로 소름이 돋았습니다. 어쩜 이리도 현실 반영을 잘했는지. 문득 이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의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왜냐면, 상상 이상으로 현실에서 PC주의가 점점 더 극단적이 되어 가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1권에서 여신관과 파티 맺고 1권 만에 리타이어 한 여 마술사의 남동생과 그를 주워준 레어 소녀의 비중이 꽤 높습니다. 이들을 통해 극단적인 PC주의는 경계해야 된다는 메시지를 던지죠. 차별 타파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배려는 때론 사람의 자존심을 박살 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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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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