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 년 전에 우리나라에 이런 만화가 있었습니다. 불로장생하는 남자가 싼 똥을 먹은 개를 잡아먹은 여자가 불로장생을 얻어 죽지도 못하고 수백 년을 살면서 남편만 십수 명이고 그들이 죽을 때마다 무덤 만드느라 개고생을 했다는 일화를 이번 17권을 읽으면서 문득 생각이 났군요. 오래 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위의 구절은 개그 만화에서 풍자식으로 표현한 것뿐이지만 사실 필자가 이 작품의 리뷰를 써 오면서 누차 언급했듯이 불로장생은 할 것이 못됩니다. 물론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필자 같은 인간이라면 한 번쯤 불로장생을 얻어볼 만은 합니다만, 대부분은 미쳐버리겠죠.


호로도 한때는 그런 시절을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하도 떠나보내는 사람이 많아서 불로장생의 영약이라는 일각 고래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도 하였죠. 이걸 남자에게 먹이고 자기와 같은 시간대에 살게 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허황된 짓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죠. 누구보다도 똑똑한 현랑이라고 자부하는 그녀가 이걸 모를 리는 없었을 텐데도 그럼에도 이걸 찾아 여행을 하였으니 그녀가 처한 현실이 얼마나 비참한지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것은 떠나가는 자를 붙잡지 않고 배웅하며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키는 것, 그리고 남자가 그렇게 떠나가면 다시 여행길에 오르고...


로렌스와의 관계에서도 잘 닦인 레일 위를 달리는 것처럼 종착지는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녀는 로렌스가 죽은 뒤의 예정을 이미 세워두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다시 여행길에 오를지 종착지로 정한 뇨히라라는 온천 마을에서 그가 세운 온천장을 물려받아 언제까지고 그와의 여행을 추억하며 지난날을 곱씹을지는 아직은 밝히지 않고 있지만요. 아마 18권이 나오기 전 광고 카피처럼 그와의 여행을 추억하며 지내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로렌스가 호로와 평생을 지내기로 하고 행상로를 정리한 끝에 뇨히라에 자리 잡은지 어언 6년이 흘렀습니다. 중세 시대를 표방하는 이 작품에서 30줄에 들어선 그는 이제 중년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호로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이고요.


이번 17권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반드시 헤어짐은 온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에 대비하며 지금에 충실히 하고자 합니다. '헤어질 땐 웃으며'라고 했던 지난 여행길에서의 말을 잊지 않으려는 두 사람, 그것이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어렴풋이 느껴가는 로렌스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해도 뭐 그렇게 우중충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발버둥 처봐야 소용없다는 것이기에 이번 17권은 에필로그 형식으로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를 보여주며 끝이 납니다. 호로는 여행길에 만난 여자들을 죄다 초청해서 내가 인생의 승리자라며 대놓고 염장질을 해대고, 로렌스는 호로가 여행길에 만난 여자들을 초청하자 뭔 일 터지는 거 아닌지 노심초사하면서 좌불안석이 되어 갑니다. 그러다 피날레로 초청한 만인 앞에서 호로가 자신(호로)의 배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본 그는...


이런 사랑도 좋겠죠. 시간과 시대를 뛰어넘어 맺어지는 순애보는 언제 봐도 가슴 설레게 합니다. 다만 그녀같이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성격까지 드센 여자라면 좀 곤란한 면도 없잖아 있지만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선의의 거짓말도 하기 마련인데 호로에겐 잘 통하지가 않으니... 살다 보면 좀 피곤하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되려 이걸 빌미로 놀려대는 통에 부아가 치밀지만 로렌스야 워낙 호로에게 콩깍지가 씌워져 있어서 완전 상전 모시듯, 로렌스를 어디 지나가는 개 보 듯하는 주제에 외로움은 얼마나 타는지 잠시라도 그(로렌스)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데다 입만 열었다 하면 독설이고 돌아서면 외롭다고 팔짱을 끼워 오는 통에 그녀의 비위를 맞춰줄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될지 궁금하기도 하였습니다. 뭐, 이번 17권 외전 에피소드에서 그녀 나름대로 로렌스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그랬다고는 하는데 진실은 모르죠.


맺으며, 사실 필자는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장르가 이런 작품입니다. 상추쌈에 고기는 한 점만 넣고 고추와 마늘로 탑을 쌓아서 먹는 기분이랄까요. 마늘과 고추의 알싸하고 매운맛 때문에 비위 상해 뱉고는 싶은데 고기 맛이 나서 뱉지도 못하는 그런 기분 알려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경제부분을 빼고 좀 더 시간이라는 이야기에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로는 갯과이지만 고고한 고양이처럼 홀로 앞을 향해 걸어가면서 괜찮아라고 하지만 옆에 같이 걸어가 줄 사람을 절실히 바라는, 하지만 그건 죽어도 내색하기 싫어 독설을 내뱉고 그러다 상대가 그런 자신에게 질려서 떠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치 '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의 유키노를 보는 듯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늑향이 먼저 나왔으니 반대가 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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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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