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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에서 단골로 쓰이는 주제가 마왕과 용사의 이야기죠. 마왕이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넣을 때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용사가 나타납니다. 시작의 마을에서 출발한 용사가 동료들을 모으고 갖은 고생 끝에 마왕을 무찌르고 개선을 하는 이야기. 그리고 용사는 공주 혹은 동료 마법사(혹은 성녀)와 결혼해서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이 얼마나 훈훈한 이야기입니까. 요즘은 안 먹히는 것이지만요. 그래서 이 작품이 전 7권으로 완결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참담한 기분이었군요. 아무튼 대부분의 판타지 소설에선 용사와 동료들에 초점을 맞출 뿐 그 이면에 있는 사람, 가령 용사를 가르친 스승도 분명히 있을 텐데 이런 사람들은 왜 이야기에 나오지 않는 걸까 항상 의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고블린 슬레이어처럼 그의 스승이 간혹 등장하기도 하고, 너에게 더 이상 가르칠게 없으니 하산하라는 정통 판타지도 있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죠.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조금은 파격적인데요. 이 작품은 용사의 스승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윈 버드(이하 윈)'의 시작은 보잘 것 없어요. 그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부모의 지인 여관에서 식모살이를 하였죠. 이 시대의 고아가 식모살이라고 해도 비를 피하고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으면 그나마 나은 신세라고, 5살 어린아이는 벌써부터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일찍이 어른으로 올라설 수밖에 없었던 꼬맹이는 지식을 탐닉했고 모험가들을 흉내 내 기술을 연마하고 그러다 지나가던 '기사'들을 보고 동경의 마음을 품게 돼요. 사람들을, 약자들을 위해 살아가는 기사들은 어린 꼬맹이가 눈을 반짝반짝 빛낼 만큼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이후 윈은 오로지 기사를 목표로 저돌맹진을 해대죠. 그러다 꼬맹이가 소년으로 올라가던 어느 날 운명 같은 만남을 가집니다. 히로인 '레티', 윈보다 두 살 어린 여자애가 수련 중인 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것을 계기로 둘은 의기투합하여 열심히 수련을 해대죠. 윈의 뒤를 오빠라 부르며 쫄래쫄래 쫓아다니는 레티의 모습이 꽤나 귀엽습니다.

 

하늘이 둘을 갈라놓을지라도...

 

용사를 들먹거려 놓고 언제 용사가 나오냐고 하실 텐데, 여기서 정석적인 흐름이라면 소년 윈이 당연히 용사가 되어야겠죠. 하지만 하늘은 무심하게도 그가 아닌 그녀를 선택합니다. 세상에 남겨져 홀로서기중이었던 소년과 집안의 무관심으로 세상에 버려졌던 소녀가 같이 지냈던 5년이라는 시간. 꿈이 있기에 견딜 수 있었고, 둘이 같이 있었기에 세상에 맞설 수 있었던 시간. 마왕은 이 둘을 시샘이라고 하듯이 세상을 어지럽혔고, 신(神)은 용사가 태어난다는 계시를 내립니다. 그리고 그 용사는 '레티', 집안에서 시종들도 무시로 일관했던 천덕꾸러기 소녀 레티가 용사로 선택되어 머나먼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간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일이 요상하게 흘러갑니다. 레티는 떠나면서 그와 재회를 기대하지만 윈은 그녀가 시집을 가는 걸로 착각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죠. 이 시대엔 어리다고 해도 여자는 여자라는 듯 정치의 일환으로 시집을 가는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윈은 그런 줄 알았습니다. 멍청한, 레티가 무슨 마음으로 어떤 기분으로 마왕과 싸우며 4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는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재회했을 때 '소박맞았냐?'라는 망발을 뱉어 낼 땐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더군요. 레티는 그와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구원을 받았어요.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세상, 부모조차 친자식임에도 홀대하는 그런 집구석에서 정말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죠.

 

그런데 윈은 매일 찾아오는 자신을 귀찮아하지 않고, 수련도 열심히 같이 하고, 책도 읽어 주고, 응석도 받아주고, 놀아주니 어린 그녀가 나이는 무슨 상관이랴는 듯 사랑에 눈 뜨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죠. 공작(왕 다음 신분)의 계급인 그녀가 평민인 그와 이어질 수 없다는 걸 모른 채. 그리고 용사는 개선합니다. 이때 윈의 나이 16살, 레티가 14살, 참고로 마왕과의 싸움이 주가 아니라 이 작품은 마왕을 쓰러트린 이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타 작품에서는 전면에 잘 등장하지 않았던 용사의 스승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요. 이쯤에서 눈치챘을 수도 있는데 당연히 스승이라는 존재는 이 세계에서 찬밥 신세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죠.

 

윈은 레티를 그렇게 보내고 난후(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시집 간 줄로 알고 있음), 꿈에도 그리던 기사 학교에 입학해 학업에 매진 중이었지만 평민의 신분으로 귀족과 부잣집만 간다는 그런 학교에서 좋은 대접을 받을 리 없어요. 당연하게 이지메가 일어나고 그는 태풍에 날려가는 나뭇잎처럼 휩쓸릴 뿐이죠. 그리고 개선한 레티와의 재회, 여기서 그 흔한 양판소로 갈 것이냐 아니면 정통 드라마로 갈 것이냐의 분기점이 아닐까 했군요. 무슨 말이냐면 스승이자 사랑해 마지않는 서방님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데 그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죠. 얀데레가 될 것이냐 순애보가 될 것이냐. 정말 읽으면서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었군요.

 

레티는 어떤 길을 선택하였을까.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나를 적으로 만들게 될 테니까.' ​정말 전기가 통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했습니다. 신(神)에게 선택받은 인간을 누가 말리고 누가 적대할 것이냐.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마왕을 무찌른 용사라는 것은 황제라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바로 용사란 말이죠. 그런 용사의 스승이자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를 괴롭혔다는 건 뭐 세계 종말이라는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얀데레가 되어 미쳐 날뛴다면 싸구려 작품이 되었겠죠. 조용한 분노라고 할까요. 글로 전해지는 공포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온통 썩은 것만 있는 주변에서 때묻지 않은 주인공을 부각 시키는 연출력이군요. 넓게 보면 권선징악 계열이라서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당연히 악역도 나옵니다. '제이드'라는 후작 작위를 가진 윈의 동급생인 남학생의 등장은 윈과 레티의 앞 날에 먹구름을 끼게 하는데요.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형적인 악역 귀족 포지션으로 레티를 차지하기 위해 윈을 어떻게 해보려고 그러지만 정작 레티의 성격을 알지 못한다는 것에서 불쌍하기 그지없다고 할까요. 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세상이 멸망할 텐데...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그런 성격 때문에 일이 꼬여만 가니 용사라도 무적은 아니라고 역설하기도 합니다. 사실 황제도 어찌하지 못하는 용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윈을 신격화해도 아무 문제없음에도 그러지 않는 모습에서 얀데레와는 차이를 두고 있기도 하죠.

 

맺으며, 사람들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비판을 하는데요. 하지만 송충이는 솔잎만 먹고살아야 한다고 현대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은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주제를 알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죠. 계급사회인 주인공과 히로인이 사는 세계에서 평민인 윈과 용사라는 간판을 빼더라도 공작이라는 지위를 가진 레티가 과연 맺어질 수 있을까? 혹자는 사랑이 있으면 그깟 계급 따위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눈치 없는 놈은 아니라는 점에서 몰입도를 높이죠. 초반엔 눈치가 좀 없긴 했습니다만. 그래서 분수에 맞게 살아라는 주변에서의 무언의 압력에서 그가 느껴가는 갈등은 흥미롭기 짝이 없습니다. 부질없는 몸부림이지만요.

 

아무튼 순수함이랄까요. 어릴 적 둘이 쏘다니며 그리는 장면은 하나의 동화를 보는 듯했군요. 숲속에서 레티가 흥얼거리고 윈은 곁에서 듣는 장면이라든지. 어떤 일을 휘말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뒷일을 부탁한다'라는 윈의 독백에 응하듯 레티가 '나에게 맡겨'라며 마치 옆에서 대화를 하는 것처럼 서로의 의식을 교차 시키는 연출력은 정말 혀를 내두르게 했군요. 그리고 악역을 등장시켜 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것에선 사실 클리셰이긴한데 원래 사랑이란 장애를 뛰어넘음으로써 비로소 빛을 보게 되죠. 하지만 옥에 티까지는 아닌데 또 다른 히로인 '코넬리아'를 기용하면서 여느 하렘물과 비슷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를 낳기도 하였군요. 착한 주인공에 이끌리는 히로인이라는 진부적인 이야기는 흥미도에서 어쩔 수 없는 걸까요. 이러면 레티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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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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