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강도 높은 스포일러가 들어가 있으니 싫으신 분은 빽 하시거나 페이지를 닫아 주세요.

얼마 전 일본에서 이런 설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세계에 가고 싶으냐고,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다는 답변을 했다는군요. 사실 필자도 가끔 동경하긴 합니다. 몸이 부서지도록 빡시게 벌어도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힘든 현실보다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판타지의 세계라면, 하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현실도피하는 패배자에 지나지 않겠죠. 판타지 세계에 간다고 해도 주인공은 고사하고 마을 사람 A가 될지 어떨지 어떻게 알고 간다는 말인지. 그보다 먹는 것부터 해서 삶 전반적으로 현재보다 뒤떨어지는 판타지에서 화장실 가는 것만 해도 애로사항이 만발하지 않을까요. 휴지나 물티슈가 있을 리 없고, 위생관념은 또 어떨까요. 늘 판타지성 라노벨을 접하다 보면 이런 현실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작품은 하나도 없는 게 아쉬웠군요. 그래서 그런지 이번 6권은 그런 문제점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판타지에 환상을 가지면 어떤 일을 벌이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히로인 '미나리스'의 복수는 그녀의 고향 마을을 멸족 시키면서 무사히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인간 우월주의에 빠져 수인을 혐오하는 마을에서 감춰왔던 비밀, 수인이라는 것이 들켰을 때, 믿었던 소꿉친구들에게 배신 당하고, 자신과 엄마를 지켜줘야 될 아버지에게서 버림받고, 나아가 마을 사람들에게서 돌팔매질을 당한 끝에 노예로 팔려가던 날, 엄마는 긴 여행길을 견디지 못해 객사하고 자신은 노예가 되어야 했던 지난 과거를 곱씹으며 처절하리만치 아름답게 그리고 누구보다 가련하게, 정말 주인공도 이런 개연성을 보여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정도로 가슴 아픈 장면을 보여주었었죠. 어쨌건 무사히 복수를 마쳤다는 안도감이 이들의 정신을 헤이하게 했을까요. 주인공은 첫 번째 생에서 깨닫는 게 늦다는 걸 죽음으로서 배워놓고 여전히 같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릅니다. 자신이 이세계에서 어떤 처지인지를 알고 있다면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었죠.

 

슈퍼 얀데레 성녀가 등장합니다. 어디서 주인공 '카이토'에게 필이 꼽혔는지 첫 번째 생에서부터 온 세상이 다 무너져도,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없어져도 주인공만 있으면 돼를 되뇌며 오로지 주인공만을 바라보며 일방통행 감정을 비춰왔던 성녀가 난입합니다. 그녀도 첫 번째 생에서의 기억을 가진 채, 얀데레의 특성은 자신의 감정 때문에 상대가 곤란해한다는 걸 모른다는 겁니다. 나의 마음만이 진실이자 정의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 방해물은 무엇이 되었든 제거하고 상대를 속박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의 표본인양 난입해오던 성녀는 주인공 '카이토'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버립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이세계로 왔을 때 진정으로 맺어지겠다고, 말이 곤란이지 얀데레는 공포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근데 사실 성녀를 얀데레로 각성 시킨 원인은 주인공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어요. 마왕을 무찌르라고 소환했더니 정작 그 마왕과 눈이 맞아서 헤벌쭉하고 있으니 누가 봐도 울화통이 치밀겠죠.

 

 

자, 이세계에 갈 수 있는 수단이 발견되었다면 여러분은 어떤 행동을 하시겠습니까.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랄까요. 한 번쯤은 호기심으로, 현실의 피폐한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위해, 판타지 소설에 심취해 나도 영웅이나 용사가 되고 싶다는 일념, 어떤 욕구든 한번 마음속에 차오르게 되면 사람은 그걸 잡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하죠. 여기에선 이세계로 가고 싶다​는 욕망, 그날, 주인공 '카이토'가 전이되던 날, 학교에서 마법진이 그려지고 많은 학생들이 사라진 장면을 보았다면 허구에 지나지 않았던 이세계가 실존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근데 이세계가 실존한다는 걸 알았지만 정작 어떻게 가야 되는지를 모르겠네. 욕망에 이성을 잡아먹힌 사람이 온전한 사고관을 보인다는 건 애초에 무리라는 걸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흔히 판타지에서 마법적으로 뭔가 소원일 빌 때 쓰는 방법이 뭘까요. 그것은 재물, 이 작품에서는 '용사가 되고 싶다'​는 방구석 폐인 같은 녀석들이 [전이 지원자]라 불리며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있었는데요.

 

그런 상황에서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의 미래에 평온이 존재할까. 전이 당사자의 귀환인 것입니다. 그날,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전이 사건의 당사자. 수많은 학생들이 사라지고 유일하게 돌아온 주인공. 어떤 장면들이 연출될지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었군요.

이세계에 있을 땐 어떻게든 현실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데 정작 현실로 돌아오니 이세계의 기억은 없고 1년 4개월이라는 기간이 지나 있었습니다. 1년 4개월이라는 기억의 공백, 그리고 주인공을 맞아주는 현실은 비정하기 짝이 없었는데요. 부모는 행방불명, 전이 사건이 휘말려 많은 학생들 또한 행방불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기억이 없어 혼란스러운데 거기에 부모에 이어 친구들도 다 행방불명이군요. 유일한 혈육인 동생 '마이'만이 그를 맞이해줍니다. 그런데 '마이'도 어딘가 이상합니다. 이 작품에서 제정신인 사람은 단언컨대 없어요. 동생은 '성녀'에 버금갈 정도로 얀데레가 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더해 독설까지 내뱉고 있습니다. 말은 가리는데 듣고 있으면 인간이 가져야 할 존엄을 사포로 박박 문지르는 느낌이랄까요. 외로움을 많이 타는 동생은 돌아온 오빠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반갑습니다. 부모가 없어지고 친구들도 다 행방불명이 된 세계에서 1년 4개월이라는 시간을 홀로 지냈던 동생.

 

동생은 두렵습니다. 오빠가 다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째서 이 작품의 히로인들은 하나같이 엽기적이고 극단적인가. 어릴 적부터 병약한 자신을 위해 모든 걸 쏟아 주었던 오빠는 세상 누구보다도 부모보다도 좋아하고 더 의존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아요. 가정의 화목은 남매의 우애가 깊은 만큼 좋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동생이 오빠를 생각하는 우애는 그런 우애가 아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인데요. 어릴 때부터 온통 동생 동생 노래만 해댔던 시스콘은 자신이 재앙 덩어리를 낳았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것에서 이놈(주인공)은 대체 삶에 있어서 배우는 게 하나도 없구나 하는 걸 알게 해주죠. 그러니까 이세계에 가서도 등에 칼 맞지. 자, 동생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오빠가 돌아왔습니다. 이제 두 번 다시 오빠를 놓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오빠는 동생 서랍장에서 피 묻은 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급변하는 상황, 기억이 조금식 돌아오는 주인공.

 

맺으며, 이번 에피소드를 한마디로 표현 하라면 '미친자들의 세계'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전이 지원자]들이 이세계로 가기 위해 전이 당사자들의 주변 인물들을 노리는 장면 장면들은 시리어스가 따로 없었군요. 이세계라는 중2병에 심취하면 이런 결말도 일어날 수 있겠다 하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할까요. 그리고 부모와 오빠를 잃어버린 동생의 어긋난 마음은 애잔하게 하면서도 공포를 불러옵니다. 오빠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하고 오빠를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동생의 일탈은 세상 모든 파탄으로 모아 놓으면 이 작품처럼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아무튼 이세계에서 살아 돌아온 주인공과 이세계로 가고 싶어 하는 [전이 지원자]들 사이에 뭔 일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두근거림은 몰입도를 상당히 높여 주는데요. 결국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이 [전이 지원자]들에게 희생되고 그걸 계기로 주인공이 기억을 조금식 찾아가는 모습은 작가의 유려한 말솜씨를 스파이스로 해서 상당히 인상적이었군요. 또한 기억을 되찾는 것만이 동생을 위하는 길이라며 애쓰는 모습도 꽤나 애잔하게 하죠. 시스콘을 자처하며, 사실 이 시스콘 기질 때문에 동생이 잘못된 길에 들어섰음에도 반성하는 기미도 보이지 않는 모습은 짜증이 났습니다만.

동생이 아무리 존엄을 갉아먹는 독설을 날려도 외로움에 등을 파고드는 동생을 내치지 못하는, 세상 유일하게 남은 혈육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서도 싸워가는 오빠의 모습은 참... 그런 따뜻한 오빠를 지키기 위해 동생도 손을 더럽히는 걸 마다하지 않는 모습에서 히로인 미나리스 만큼이나 처절하리만치 아름답고 가련하다고 할까요. 어쨌거나 [전이 지원자] 말고도 현실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흑막이 따로 있지만 글이 길어지는 관계로 언급은 안 했습니다. 또 주인공 동급생도 나와서 시리어스를 찍어대지만 이 캐릭터는 다음에 언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블로그 이미지

현석장군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095)
라노벨 리뷰 (937)
일반 소설 (5)
만화(코믹) 리뷰&감상 (129)
기타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