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나라에서 개를 키우는 이유가 난로를 겸하기 위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화에서도 종종 표현되기도 하는데 외풍이 심한 집 안에서는 물론이고 부득이 노숙을 하게 되었을 때 개를 끌어안고 자면 이보다 좋은 보온재는 없다고 하더군요. 개가 사람보다 체온이 조금 더 놓은 것도 있고 털의 보온성도 뛰어나다고,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이 작품의 히로인 '호로'가 딱 그짝이기 때문인데요. 호로의 고향을 찾아 북쪽으로 가는 데다 계절마저 겨울이다 보니 작중 별다른 난방 기능이 없는 시대에 개만큼 난방이 뛰어난 것도 없죠.


그런데 차마 호로 자체를 끌어안고 자는 건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본 모습인 거대 늑대로 변신했다간 깔려 죽을 테니 부득이 호로의 꼬리로 타협해서 잘 때마다 호로의 꼬리를 끌어안고 자는 로렌스나 콜을 보고 있자니 여간 웃긴 게 아닙니다. 호로에게 있어서 꼬리란 트레이드 마크이자 자존심이라서 기분이 안 좋을 때 꼬리 칭찬을 해주면 단박에 풀릴 정도로 소중히 여기고 있는데, 그런 소중한 꼬리를 여행의 동반자를 위해, 그것도 꼬리 빌려 주려면 옆으로 자야 되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빌려주는 호로에게 있어서 로렌스와 콜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죠.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맞이하려는 배은망덕한 사람들 때문에 죽을 뻔도 하고, 보기 좋게 사기도 당하고, 위험한 거래에 뛰어들었다가 노예로 팔려갈 뻔도 했고, 죽도록 두들겨 맞기도 하는 등 호로를 만나고 나서 되는 일이 없는 로렌스에게 있어서 그녀는 그에게 어떤 존재일까. 입만 열었다 하면 먹는 걸 찾고, 술 고래에 뭔 말을 하면 어린애 취급이고 속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어서(그전에 로렌스 얼굴에 다 쓰여 있는 것도 문제지만) 그걸 캐치하고 사정없이 정강이를 까는 호로가 얄미워 죽을 지경인데도 곁에 있고 싶은 건 그만큼 로렌스는 사람의 온기에 굶주려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호로를 만나기 전엔 보이는 거라곤 말(馬) 엉덩짝이고 저 말(馬)이 사람 말을 해서 내 상대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던 수천의 밤을 외로움에 지샜던 그에게 있어서 호로는 신선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걸어 다니는 지갑 브레이커라도 그녀가 언제까지고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녀가 신경 쓰는 것을 해결해주려고 기를 쓰는 게 아닐까. 일시적이지만 본업인 행상인을 접으면서까지 윈필국(國)에 들어온 이유는 그러한 측면에 기인했지 않았나 하는, 그녀의 동료로 보이는 거대 늑대 뼈를 찾아 수도원에 찾아온 이들을 맞이하는 건 겨울의 눈보라였는데요. 여기서도 개과의 호로는 여지없이 본능에 충실하여 들뜬 채로 뛰어다니는 게 영락없는 감성이 폭발하는 10대 소녀였습니다.


그녀가 로렌스와 콜을 끼고 바다를 건너서까지 윈필이라는 나라에 온 이유는 죽어서까지 인간에게 농락 당하는 동료의 뼈를 찾아 어떻게 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단서를 찾아 윈필의 수도원까지 왔지만 역시나 가는 곳마다 명탐정 코난처럼 끊임없이 사건을 몰고 다니는 로렌스 덕분에 급기야 성추행까지 당하는 등 히로인 포지션으로써 말이 아니게 되는데요. 거기다 수도원에서 만난 이교의 신중 하나인 황금의 양이 변신한 양치기에게 어린애 취급 당하면서도 반격을 해주지 못해 울화통 터지고 그러다 그 양치기에게서 고향에 관련된 여러 가지를 접하면서 한층 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북받쳐 목놓아 울어 버리는 등 현랑과 소녀의 경계를 넘나들며 바쁜 나날을 보냅니다.


사실 이번 에피소드 역시 복잡한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호로처럼 고향을 지키지 못하고 쫓겨났던 황금의 양이 전해주는 제2의 고향 이야기는 호로의 마음을 헤집어 놓습니다. 자신은 떠나 온 처음의 고향을 잊지 못해 우울한데 다들 잊고 새로운 고향을 만들라고 하니 호로의 우울증은 더 커져만 갑니다. 새로운 고향을 만들고 싶어도 동료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세상에 나 혼자 남은 듯한 기분, 그래서 동료일지 모를 거대 늑대의 뼈에 그렇게 목매는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그 외로움을 달래려는 듯 콜을 옆에 끼고 끔찍이 귀여워해주는 모습에서 장차 아이를 낳으면 좋은 엄마가 되지 않을까 하는 복선을 설핏 비치기도 했군요.


10년 된 부부처럼, 사랑보단 정(情)으로 살아가는 이들, 호로와 로렌스를 바라보고 있으면 딱 그렇습니다. 언제고 이별이 찾아올 시기가 있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면서 지금의 시간을 소중히, 찾아올 이별의 시간을 애써 외면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대하며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은 따뜻하다기보다 애처롭게 다가옵니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호로를 보살펴 준다거나 한 이불을 쓰는 사이라도 일선을 넘지 않는(그보다 콜이 옆에 있어서리..), 그럼에도 서로가 쌀쌀맞고 빈정 상하는 말을 해도 나쁘게 듣는다기보다 이런 사이니까라며 자기 합리화하는 등 수면 아래엔 헤엄을 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을 휘젓는 나날...


맺으며, 어차피 코난도 풀지 못할 사건에 휘말리거나 죽을 위기에 봉착하더라도 기승전결로 좋게 좋게 끝나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니까 본 내용은 크게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살다 보면 고향이고 없어졌다면 만들면 되는 게 고향이라는 교훈적인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는 말씀은 드릴 수 있군요. 하지만 호로는 그런 건 인정할 수 없다며 분노에 몸을 맡기지만 그녀도 알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요. 이게 참 타산적이면서도 현실에 순응하는 거라서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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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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