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 외전 형식입니다. 라티나가 사라지고 그게 마왕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버린 데일이 마왕 소탕전을 끝내고 겨우 찾아낸 반려라는 오픈 엔딩으로 끝낼 수 있었으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작가가 집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후일담인데요. 만화와 더불어 웬만한 작품들 대부분이 오픈 엔딩으로 끝내거나 작가가 중도에 도주해버려서 미완으로 끝나는데 반해 이 작품의 작가는 직업의식이 투철하다 할 수 있죠. 사실 뭐 오픈 엔딩으로 끝난다고 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독자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고 여운을 남게 함으로써 두고두고 회자시킬 수 있는 수단이 오픈 엔딩이기도 하니까요.

 

데일에 의해 재앙의 마왕이 쓰러지면서 마인족들은 인간들과의 교류를 희망하고, 라티나의 언니 크리소스는 마인족을 이끄는 왕이 되어 인간들의 나라 라반드국(데일과 라티나가 소속된 나라)과의 교류를 위해 찾아옵니다. 어릴 적 그렇게 해어지고 다시 만난 동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동생과의 재회,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나라의 국왕으로써 정치적인 소임을 다하기 위해 라반드국을 찾은 크리소스는 모든 걸 내팽개치고 동생만을 바라보는 팔푼이가 되어버립니다. 그에 두통을 느끼는 데일, 한때는 남자 같은 이름의 크리소스라는 단어를 듣고 데일은 라티나가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닐까 하고 오해를 해버리기도 했었죠.

 

시간이 흐른다는 것, 그것은 또 다른 이별을 예고하는 것, 그러나 작가는 그걸 살리지 않는다.

 

라티나의 절친 클로에가 결혼식을 올립니다. 어릴 적 라티나에게 불합리를 가했던 선생을 두고 볼 수 없어 교실을 뒤집어 엎었던 말괄량이 소녀가 라티나를 냅두고, 살아오면서 인연이 더 많았을 남자 소꿉친구를 냅두고 먼저 인생의 승리라는 레일 위에 안착해버립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 언제까지고 꼬맹이 시절에만 묶여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마냥 시계는 거침없이 앞으로 흘러 가요. 이것은 라티나에게 있어서 이별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 없는 메시지가 아닐까 했습니다. 인간보다 몇 배는 오래 사는 그녀(라티나)에게 있어서 친구들이 나이를 먹고 하나둘 없어진다는 두려움을 과연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작가는 그걸 살리지 못하는군요. 일언반구도 없어요. 아쉬웠던 게 이 부분이었군요. 나만 놔두고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버리는 불안, 그걸 감싸주는 데일이라는 극적이고 드라마적인 장면을 만들 수 있었음에도 이 작품 자체가 워낙 가볍다 보니 그런 우중충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저 현재라는 시간을 보고 느끼고 자기 삶을 찾아가는 친구에게 축복을 하고, 인간과 똑같은 삶을 살아 가려 하죠. 사람은 살아가는 환경이 무척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라티나의 차례가 찾아옵니다. 어릴 적 일족에게서 버림받았던 그녀는 기댈 곳을 찾아 손을 내밀었고 그걸 받아준 소중한 사람과의 결혼.

 

작가는 또다시 배신을 때린다.

 

음... 배신이라고 하기엔 어패가 있습니다만. 이 작품 자체가 가볍다 보니 심각한 이야기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요. 한마디로 라티나가 결혼한다는 걸 알게 된 [친위대]의 반란은 속된 말로 깨는 것이었습니다. 1권 때는시리어스 하긴 했지만 이후부터는 사실 이런 분위기인 건 알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요정 공주를 보살피는 모임] <- 이것만 봐도 이 작품이 얼마나 가벼운지 알 수 있죠. 아무튼 이 미친 모임이 일으키는 어떤 행위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스포일러라서 언급은 힘들지만, 남정네들만 우굴거리는 소굴에 여자애 하나 떨궈 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할 필요도 없겠죠.

 

그런 유사한 일이 벌어집니다. 아무리 라티나가 마법 소양이 뛰어나 공격과 방어에 능통하다지만, 자신이 일하는 식당 단골들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건 라티나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반대로 그 남정네들도 자신들의 마음속 히로인인 그녀에게 손을 댄다는 건 있을 수 없었습니다만.

 

그렇기에 이 작품이 얼마나 가벼운지 잘 나타내는 것이고, 그렇기에 유괴하다시피 한 걸 장난으로 치부해버리는 대목에서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었는데요. 더욱 문제인 것은 라티나의 위기의식이 부족하다는 것이군요. 아무 의심 없이 남자들을 따라가는 건 현실의 교육과 반대되는 내용이 아닐까라고 한다면 필자가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요. 작가도 그런 점을 의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어떤 일을 위해 라티나도 친위대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고 면죄부를 주는 것에서 이거 북 치고 장구치고, 병 줬다가 약 줬다가 혼자서 다 해 먹는다는 느낌을 받았군요. 또 쓰지만 이 작품이 이렇게 가볍다는 걸 새삼 알게 된 장면이었습니다.

 

맺으며, 1권이 발매되고 키잡물이다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긴가민가했었는데 사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이건 데일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된 키잡물이라기보다 라티나의 독점욕에서 시작된 키잡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일족에게서 버려지고 아빠는 객사해버리고 천애 고아가 되어 오늘내일하는 현실에서 자신을 주워주고 길러주고 많은 것을 알려주는 이가 있다면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불행한 과거를 가진 아이가 커서 가족을 맞아들일 때 하는 행동은 두 가지라고 하죠. 가족을 끔찍하게 보살피거나, 똑같이 불행한 과거를 걷거나. 라티나는 전자가 되었죠. 이미 어느 정도 나이가 찰 때부터 데일에 대한 독점욕을 보이기 시작했고, 좀 더 커서는 질투심까지 탑재하기에 이릅니다.

 

어쩌면 데일을 권속으로 삼은 것도 이 독점욕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버림받은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그녀가 자신을 보살폈던 데일을 특별히 여기는 건 당연한 것이었죠. 그래서 한때 데일은 도망 다니기도 했고요. 이번에도 데일은 아버지로서 그녀를 보내주려 했다는 대목이 있으니 뭐, 아무튼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발이 빠른 사람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은 좀 그런가요. 애초에 라티나 이외에 이렇다 할 히로인이 없었으니 처음부터 이렇게 되었을 운명이었겠죠. 그건 그렇고 1권 이후 일러스트레이터를 바꾼 건 신의 한수가 아니었나 느낌을 받았군요. 특히 라티나의 절친 클로에를 그린 일러스트는 꽤 잘 뽑혔습니다. 그리고 진엔딩, 누구나 바라는 이런 엔딩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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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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