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모험심 강한 사람이라도 느닷없이 지식에도 없는 땅에 떨어진다면 어떨 것 같나요. 가령 우리나라같이 안전한 곳에서 살다가 알몸으로 아프리카에 떨어진다고 생각해봅시다. 거기엔 사자 등 사람에게 위협이 되는 동물이 아주 많아요. 그나마 총이라도 쥐어져 있으면 몸이라도 지키겠는데 생전 군에도 안 갔다 온 사람에게 총을 쏘라고 하니 미치고 졸도할 일이 아닐까요. 총이고 좌시고 그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누구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겠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도와 달라고 할 텐데 하필이면 식인종(진짜로 아프리카에 식인종이 있는지는 차지하더라도)이고. 그럴 때 누군가가 말합니다. 식인종이든 뭐든 하여튼 사람들에게서 무엇이든 빼앗아라. 그러면 길이 열릴 것이다. 그게 집으로 가는 열쇠일지도?

 

세상 모든 것들이 나만 미워해. 괴롭히고 얕보고 인간으로 대접 안 해준다면 내가 할 일은 무얼까. 바득바득 대들며 나 죽지 않았다고 어필을 하면 괴롭힘이 좀 나아질까요. 근데 괴롭힘에도 등급이 있는지라, 목숨까지 위협받는 괴롭힘이라면 이거 진짜 장난 아니고만 하고 이 사태를 벗어날 궁리를 하는 건 당연한 것이고, 그런 자기를 못 본 체한 세상은 죽도록 미울 수밖에 없겠죠. 아무도 안 도와주는 현실, 그렇담 남은 건 소원을 비는 것 밖에 없어요. 나에게 힘을, 나 빼고 모두가 적이니까, 적이라면 당연히 죽여야 되는 게 이치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겠죠. 그리고 힘을 얻은 덜 성숙한 개체는 세상을 향해 적의를 드러냅니다. 이번에 주인공과 대척점이 되는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같은 괴롭힘을 당하고도 생각의 차이가 낳은 두 개의 미래, 하나는 지키는 쪽으로, 하나는 세상 모든 것을 멸망 시키는 쪽으로...

 

이번 4권에서는 위의 이야기 두 가지가 나옵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단을 발견했고 돌아가기 위해선 힘을 모아야 하는데 깨작깨작 모아선 늙어 죽어도 다 못 모으겠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큰 거 한방을 노릴 수밖에 없죠. 그 힘은 몬스터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인간들에게서도 얻을 수 있다면? 그걸 알아버린 학생A, 주인공 '타카히로'는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수해(樹海)를 지나 간신히 사람들이 사는 성채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도착했다는 기쁨보다 이면에 감춰진 이세계 인간들의 추악한 본심을 봐야 했고 질려버린 주인공은 이세계에 대해 정보를 모으고 도망 치려하였죠. 하지만 진실된 마음가짐으로 숲에서 쏟아지는 마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가려는 엘프 자매(정확히는 고모와 조카)를 만나면서 그래도 이세계엔 썩어빠진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치유를 받아 갔었죠.

 

자, 학생A에 의해 세상이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질서가 어른들에 의해 지켜지고 법이라는 테두리를 끼고 죄를 범하면 벌을 받는 세상에서 살다가 그것이 없어진 세상에 떨어진다면, 주변 온통 나를 위협하는 것뿐인 세상, 누구도 날 지켜주지 않는 세상, 아직 정신적으로 미숙한 아이가 지금 당면한 현실을 부정하고 이전 세계에서 받았던 보호라는 테두리를 찾아 안녕을 원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런 아이에게 힘이 깃든다면, 남이사 어떻게 되든 나만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죠. 이것은 예능 프로에서 자주 언급되는 '나만 아니면 돼'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로 다가옵니다. 자,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힘(마력)을 모으는 것, 이것은 마물을 처치하고 얻을 수 있는데 여기서 생각을 전환해서 마물도 동물의 일종이고 인간도 동물의 일종이잖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될 성채는 처절한 아비규환으로 탈바꿈합니다. 느닷없이 마물 대군이 몰려와 성내로 침입하고, 자기만 살아서 현실로 돌아가겠다는 학생A는 살육을 시작합니다. 힘이라는 경험치(마력)를 얻기 위해, 주인공 일행은 이것들에 맞서서 처절한 사투를 벌여가죠. 그리고 인간 불신에 빠졌던 주인공은 이 무력한 현실에서 성채에 오면서부터 자신에게 빛이 되어주었던 어떤 여성과의 가슴 아픈 이별과도 마주해야만 합니다. 부조리한 세상, 부조리한 소원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져가는 성내 사람들과 현실에서 같이 이세계로 날아온 학생들, 좀 뜬금없습니다만. 3권까지 이런 상황인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아 리뷰에선 쓰지 않았는데요. 이세계는 마물과 전쟁 중이었습니다. 수해 -樹海라 여겼던 단어는 다름 아닌 樹害였던 것- 그리고 현실에서 전이되어온 사람들은 용사가 되어 마물과 싸워야만 했고, 그 역사는 수백 년, 그럼에도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덜 성숙한 아이(학생A)가 앞뒤 분간도 못하는 세상에서 떨어져 힘이라는 걸 손에 넣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조리한 일을 당하면 어떤 짓을 벌일까. 전부가 사람을 위하고 지키는 용사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이미 오래전부터 이 작품은 역설하고 있었죠. 그것을 우린 도덕적 해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정말 어쩔 수 없이 둘 중 하나만 살아야 되는 상황에서 내가 살기 위해 상대를 희생 시키는 걸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라고도 하지요. 이 작품은 이 두 개가 공존한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정의라는 개념에 혼동이 올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작가는 전자를 우선시합니다. 이것은 결코 카르네아데스 판자 따윈 아니라고, 성채에서 천(千)에 이르는 희생자를 내며 싸움은 격화일로를 걷습니다.

 

참고로 중간중간 학살해대는 인물을 학생A라 칭한 건 이름 자체가 스포일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 위 두 번째 문단의 등장인물도 언급할까 했는데 글이 길어지니 다음으로 미뤄야겠군요. 성채로 몰려온 마물 대군을 부린 핵심 인물이긴 합니다만. 어쨌거나 나중에...

 

맺으며, 용기 있는 용사는 있어도 착한 용사는 없다. 이세계 전이해서 마왕이 되든 뭐가 되든 착한 길로만 가는 등장인물들은 다 허구라는 듯 이 작품은 현실을 들이밉니다. 세상엔 별의 수만큼 사람의 마음이 있다는 걸 알려주죠.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짓을 서슴지 않으며 그걸 정당화하고 의심하지 않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나도 아프리카 오지에 떨어지면 같은 길을 걷게 될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고 할까요. 그것이 정의롭지 않고 윤리와 도덕에 반한다고 해도, 도덕과 윤리란 내 목숨보다 우선시할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감정과 사고를 가졌기에 인간이고 윤리와 도덕을 알고 있으니까 우린 동물과 다른 점이라는 철학적인 메시지도 담고 있는 듯한? 작가의 의도야 필자는 모릅니다만. 한가지 아쉬웠던 건 학생A가 혼자만 살기 위해 저질렀던 만행 부분에서 그를 철저한 악이 아니라 고뇌에 찬 악으로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 좀 더 심도 있는 철학물이 되었겠죠.

 

아무튼 일본에서 이 작품의 평가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상당수 라노벨에서 작품이 좀 팔린다 싶으면 고질병이 하나 생깁니다. 바로 이야기 질질 끌기, 하나의 주제를 놓고 대체 몇 페이지나 생각을 구구절절 늘어놓는지 정말 학을 떼게 합니다. 이러면 기승전결이 먹혀 버리죠. 긴박했던 분위기는 식어 버리고요. 그러다 보면 놓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바로 잘 싸우다가도 적을 놓치게 되거나 보내줘야 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짜증을 확 불러옵니다. 이번에 주인공이 성채에서의 공방전을 거치며 뭔 놈의 생각과 느낀 점을 늘어놓는지 이 작품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필자로써는 순간 0.5점을 줘도 시원찮을 판이었다고 할까요. 게다가 추리를 하면서 답을 유추하기 직전 뭔가가 끼어 들어서 답을 내놓지 않는, 맥을 끊어버리는 짓 때문에 짜증 지수가 더 높아졌었는데요. 결국 기승전결은 물 건너가는 것에서 막말로 불쏘시개로 써버릴까는 생각도 들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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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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