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리빌드 월드 4권 리뷰 -반대의 상황도 있을 수 있지-
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주의
판타지에서 으레 등장하는 던전의 입장이 되어 보자. 오랜 시간을 거쳐 던전을 생성하고 몬스터를 배치하고, 보물 상자도 이곳저곳 배치하는 등, 집 인테리어 꾸미듯 이제 좀 아가 자기 하게 꾸며 놨더니 이넘의 인간들이 쳐들어와서 몬스터를 다 죽이고 보물 상자도 다 쓸어가네? 던전을 인간들의 세계로 빗대어 보자면 던전은 도시이고, 몬스터는 시민이고, 보물 상자는 인테리어쯤? 인간도 보석을 인테리어나 액세서리로 사용하잖아요. 자, 이제 철학적인 물음을 던집니다. 악은 과연 누구일까. 이기는 놈이 장땡? 던전 마스터 입장에서 침략자(인간)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쎈 몬스터를 배치하고, 던전 구조를 복잡하게 하는 등 난이도를 올리면 되나? 그럴수록 인간도 더 강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래서 던전 마스터는 생각합니다. 독은 독으로 없애면 되지 않을까?
3권에서 목숨이 간당간당해질 정도로 무지막지한 보스급 몬스터를 처치하고 일확천금을 손에 넣은 주인공은 치료하고 무장하는데 돈이 다 나가버렸습니다. 그래도 뭐 그동안의 활약으로 살 집도 구했고, 굶어 죽을 일도 없게 되었으니 만족해야겠죠. 하지만 앞으로도 굶어죽지 않으려면 헌터 일을 해야 하고, 경쟁이 심한 이 업계에서 남들이 가는 유적에 가봐야 얻는 건 푼돈. 그래서 미발견 유적이나 구역을 찾아 오늘도 열심히 황야를 달립니다. 기기를 이용해 마치 포켓몬 GO를 하듯 미발견 유적을 찾아다니기는 하는데 이게 쉽게 발견될 리가 없죠. 그러던 어느 날 미발견 유적을 찾던 중 두 명의 여성 헌터와 조우하는 주인공, 오늘의 이야기는 뒤처리를 확실하게 하자, 던전의 입장이 되어 보자, 사람을 의심하자, 나쁜 사람은 때려주자. 참고로 주인공은 여자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두 명의 여성 헌터는 지도상(廂)으로 유적의 구조를 파악해 지도를 만들어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죠. 캐럴과 모니카. <- 이 두 명이 이번 4번의 메인 히로인이 되겠는데, 그러해서 스포일러를 어디까지 해야 될지 난감하다고 할까요. 일단 캐럴은 주인공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위험한 유적을 돌파하는 입장이고, 모니카는 어째선지 그 주변을 맴돌다 실종된 후 구조대에 의해 구출이 되죠. 아무튼 작가는 전재를 미리 깔아 둡니다. 흔히 판타지에서 던전에 비유할 수 있는 유적의 입장에서는 유적을 지키는 기계 몬스터를 쓰러트리고, 보물 상자에 비유할 수 있는 유물을 훔쳐 가는 인간은 도적인가? 아닌가.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이걸 주인공과 캐럴의 시각으로 풀어놓습니다. 근데 사실 주인공과 캐럴은 이런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자기들 태어나기 이전부터 유적이 있었고 유물을 수집해왔으니까요.
유적은 멸망한 구시대 도시를 말하는 것이고, 유물은 그 구시대를 풍미했던 물건들이죠. 그리고 구시대 인간들은 자기들을 지키기 위해 방위 기계들을 만들었습니다. 구시대 인간이 멸종하고도 기계는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을 충실히 하기 위해 이제는 유적이 된 도시를 방어했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번영을 이룬 인간들은 다시 옛 영광을 위해 유적에서 유물을 찾아다닙니다. 당연히 유적을 지키던 기계들은 침입한 인간들을 도적으로 간주하고 제거에 나서게 되죠. 자, 그러면 누가 나쁜 것인가. 사실 본 작품에서는 누가 악이고, 나쁘다는 설정도 없고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저 인간은 먹고살기 위해, 기계는 명령에 충실히 침입자를 제거하는 것뿐이죠. 하지만 갈수록 인간의 세가 불어나고 무기가 진화하면서 유적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학습을 통해 인간들은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그게 이번 4권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을 독으로 규정한 유적 시스템이 독을 없애려면 같은 독을 쓰면 되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내리죠. 그리고 그동안 전례가 없었던 이 일은, 유적 시스템이 상정한 그대로 많은 헌터들의 목숨을 앗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공 일행도 휘말려서 이번에야말로 그동안의 위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위협과 마주하게 되고요. 자, 경쟁 관계라도 돈을 내면 의뢰를 들어주는 헌터들의 세계에서 의뢰를 받아 조난당한 헌터들을 구하기 위해 파견 나갔는데 그게 함정이라면? 구조 현장에 도착해 있어야 할 헌터들은 보이지 않고, 핏자국만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데도 구조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되는 상황을 주인공 일행을 이용해 SF 공포물처럼 풀어놓는 작가의 능력에 제법 좋습니다.
그리고 마주합니다. 진짜 공포가 무엇인지, 0과 1밖에 모르는 유적 시스템이 어떤 학습을 했으면 헌터를 고용해 헌터들을 몰살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헌터는 주인공 일행이 잘 아는 인물? 그렇기에 방심했고, 알던 사람이이기에 위화감을 알게 되어 순간적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들은 몰입감 최상이었군요. 물론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복선을 깔고, 알기 쉽게 풀어 놓아 범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볼 수는 있습니다만, 이런 점은 오히려 독자들의 부담을 줄여주어 읽기 쉽게 해주는 요소가 아닌가 했습니다. 자, 유적은 도적(인간)을 퇴치하려 하고, 인간은 살기 위해 유물을 강탈하려 합니다. 선악의 구분을 선을 그어 딱 매듭을 짓는 게 아닌, 서로가 사활을 걸고 미래를 지키려는 설정은 어떻게 보면 인간미가 넘친다고 할까요.
맺으며: 사실 어디서 많이 본 설정인데? 같은 느낌이 없지는 않습니다. 선한 이미지였던 사람이 사실은 악당이었고, 주인공 일행은 속았다. 함정에 빠지고 나서야 깨닫고, 그 함정을 돌파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그 끝에서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지만 군더더기 없이, 복잡함 없이 풀어내고 있어서 나름대로 흥미롭긴 합니다. 그리고 캐럴과 같이 다니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해주는 그녀와 마음을 트는 장면도 흥미롭죠. 주인공은 살아온 환경 탓에 자기 이외에는 무관심하고 타인을 신뢰하지 않아 타인과의 교류를 피하던 주인공이 어째서 캐럴과는 죽이 잘 맞는가 하는 물음을 던집니다. 이게 좀 흥미로운데, 어떤 트러블에서 캐럴이 주인공을 달래는 장면이 있습니다. 캐럴은 생긴 거와는 반대로 어머니와 같이 자상하게 주인공을 달래죠. 주인공은 순순히 받아들이는데, 이때 주인공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된다고 할까요. 아닌 게 아니라 캐럴은 늘 주인공 뒤에서 받쳐주듯 행동하기도 하죠.
그렇다고 캐럴이 판타지의 성녀 같은 이미지인가? 라면 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살기 위해 자신의 가치(미모)를 100% 살려 살아가고 있죠.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세계에서 여자 혼자 살아가려면 어떤 일도 마다하면 안 되는 비참함도 좀 섞여 있습니다. 아무튼 주인공의 내비게이터 알파의 정체가 무엇인지 조금 더 밝혀집니다. 아직은 주인공을 이용해 무엇을 하려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요. 사실은 그 연장선을 이번 4권에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유적 시스템에 고용된 헌터라 할 수 있습니다. 알파는 구시대 유물의 시스템 중 하나거든요. 그 알파의 서포트를 받아 날로 강해지는 주인공이지만, 그 알파가 없어졌을 때 주인공은 어떤 일을 당하나 같은 것도 보여주기에 이번 4권은 여러 가지로 흥미롭습니다. 사선을 넘나들며 아무렇지 않게 기계 몬스터를 쓰러트려가는 주인공을 보고 신인 헌터들이 자극받아 강해지려는 것도 흥미롭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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