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고블린 슬레이어 작가의 또 다른 작품입니다. 전체적으로 D&D 느낌이 많이 나고, 진행 방식은 고블린 슬레이어와 비슷합니다. 얕잡아 보고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모험가의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시체 회수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던전에서 죽은 모험가를 시체 주머니에 담아 신전에 갖다주면 수녀가 신(神)에게 기도를 올려 부활 시켜주죠. 하지만 매번 부활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신(神)에게 얼마만큼의 공양(제물)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조금은 어안이 벙벙해지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소 기부를 많이 하라는 뜻이죠. 주인공은 시체를 회수해 주고 부활에 성공하면 당사자에게서 수수료를 받습니다. 이 부분이 고블린 슬레이어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죠. 고블린이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다고 그걸 없애고 의기양양하냐를 이 작품에 빗댄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시체 회수로 돈을 번다며 사람들은 그를 구더기에 비유합니다.

이야기는 아무도 공략하지 않은 [미궁]에서 시체가 발견되면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후에 어떤 복선의 시작이기도 하죠. 주인공은 누구인가 하는. 주인공은 기억이 없습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시체 회수꾼을 하고 있었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상황이었죠. 지금은 여러 모험가들을 알고 있고, 뻔질나게 신전에 드나들다 보니 수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주인공의 기억 찾기도 병행됩니다. 내가 왜 미공략 던전에 엎어져 있었나. 이후 작은 모험가를 만나며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긴 합니다만. 주인공은 수녀의 기도로 부활에 성공했죠. 수녀는 왜 그를 부활 시켜주었나. 부활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데, 그 돈을 수녀가 부담했다는 것에 의문점이 남습니다. 주인공은 오늘도 던전에 들어갑니다. 고블린 슬레이어가 고블린을 없애러 간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시체를 찾아다니죠. 기억이 없어도 일단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그 끝은 의외로 싱겁게 찾아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바스타드'는 칼의 일종입니다. '블레이드'는 칼날을 의미하죠. 주인공은 던전에서 전멸한 모험가 무리를 만납니다. 아니 아직 한 명이 살아 있으니 전멸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시산혈해 산(山)에서 홀로 커다란 칼을 휘두르며 간신히 살아 있는 작은 모험가를 보게 되죠. 자, 혹시 도서를 보시게 되면 여기서부터 정말 집중하면서 읽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블레이드&바스타드'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니까요. 작은 모험가는 사슬에 목이 묶여 있는 노예였습니다. 그 사슬의 끝은 죽은 모험가의 손에 잡혀 있었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작은 모험가를 주인공은 도와줍니다. 여느 이야기였다면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는 흔한 이야기였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시작을 알리는 종입니다. 작은 모험가는 금세 주인공을 따르게 되죠. 이때부터 둘은 같이 다니게 됩니다. 하지만 작은 모험가는 노예였고, 주인이 따로 있었습니다. 던전에서 작은 모험가를 찾으러 온 무리들이 주인공을 덮치게 되죠. 그리고 이야기는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작은 모험기의 이름은 '가비지'. 빨간 머리에 빼빼 마른 몸. 신전의 수녀에 의해 작은 모험가는 여자애로 판명되죠. 인간의 말은 못 합니다. 첫인상은 개와 같다던 주인공의 말처럼 그녀의 대사는 arf(멍멍), whine(낑낑), yap(짖는다), 기분 좋으면 bow 하기도 하고, 던전에서 sinfe(킁킁) 거리기도 합니다. 즉, 그녀의 대사는 개가 내는 의성어를 영어식으로 발음만 할 뿐이죠. 사람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는데 주인공이 하는 말은 다 알아듣는 듯합니다. 큰 칼을 짊어지고 전위에 서서 종횡무진을 활약을 하게 되면서 주인공이 하는 일이 다소 수월해집니다. 그런데 그녀를 회수하러 온 노예 주인을 격퇴했더니 이번에는 그녀의 출신을 둘러싸고 누군가가 '그녀'를 습격해 옵니다. 여기서 '바스타드'의 의미가 무엇인지 드러나죠. 바스타드는 그녀를 뜻하는 것으로, 태어나선 안 될 존재였습니다. 그렇다면 블레이드의 의미는 바스타드의 칼날이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주인공은 쫑쫑 거리며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그녀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게 될까.

이 작품에서 고블린은 인간입니다. 주점 뒤편에서 신입 모험가들을 꼬드겨 뜯어먹고, 때론 죽이기까지 하는 모험가들. 신입을 사냥하여 던전에서 고기 방패로 내몰고, 보물 상자 따는데 전문 지식 없는 그들을 시켜 죽으면 아무렇게나 발로 차서 내다 버리는 악행이 일상처럼 일어나고 있죠. 그럼에도 시골 가족에게 돈을 보내주기 위해 고기 방패로 내몰려도 꿋꿋하게 헤쳐나가던 어떤 소녀의 비명횡사. 그 소녀를 길가 돌멩이처럼 차서 날려 버리는 모험가들. 돈이 있으면 죽은 소녀도 부활이 가능하나, 모험가들은 신입을 납치하는 게 더 싸다고 생각 중이죠. 그런 지옥도에 내몰려 주인공을 습격했다가 죽을뻔했던 '라라자'라는 소년은 진짜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변덕인지 주인공에게 거둬지게 되거든요. 그리고 가비지랑 티격태격하는 게 이 작품의 유일한 훈훈한 장면이죠. 이로써 3인 파티가 되었습니다. 주인공은 고블린 슬레이어처럼 이전까진 느끼지 못했던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맺으며: 처음엔 맹견 같던 가비지가 arf(멍멍) 거리며 언제나 주인공 뒤를 쫄쫄 따라다니는 게 귀엽습니다. 신전의 수녀에게 쓰다듬 받는 건 거부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쓰다듬하면 싫어하는 모습에서 취향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아가게 하죠. 주인공은 고블린 슬레이어처럼 무뚝뚝하고 차가우면서 정(情)이 많은 사람으로 표현됩니다. 가비지에게 침대를 양보하고, 마구간에서 자는 라라자에게 간이침대도 만들어 주죠. 신전의 수녀는 그런 그에게 마음이 많이 가 있습니다. 참고로 수녀는 엘프입니다. 주인공 파티에 합류하지 않을까 하는 복선은 나와 있습니다. 아무튼 보물 상자 여는 것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고, 같은 인간이라도 믿을 사람은 몇 없는, 그런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그립니다. 부활에 실패하면 재가 되어 영영 죽어버리는 세계에서 부와 명예를 위해 던전이라는 환상을 쫓는 모험가들. 일단 1권 한정이지만 고블린 슬레이어와는 다르게 하렘을 빼고, 라이트 노벨이라는 느낌을 없애고, 전통 판타지처럼 삶과 죽음이라는 리얼리티를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스타드'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 자연스럽게 블레이드는 주인공이겠구나 하는 느낌을 들게 하는 장면은 제법 소름 돋게 해주었군요. 스포일러라서 자세히는 못 쓰지만 신화 관련으로 고블린 슬레이어 세계관에 빗대면 주인공과 가비지는 신들의 주사위 판에 올려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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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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