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전체적으로 보면 어느 여고생이 공간 분리 절단 술에 당해 이세계로 전생하여 악착같이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생태계 서열에서 비교적 하위에 속하는 거미로 환생했다는 것이지만요. 이야기도 그에 맞게 상위 개체에 쫓겨 다니고, 죽을 위기도 숱하게 넘기죠. 한창 이세계 전생물이 꽃을 피울 때 등장하여 하다 하다 거미로 환생하냐는 말도 들었습니다만, 검(劍)이나 자판기 보다야 낫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이야기의 진행 방식은 여주인공의 1인칭 시각에서 독백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미지의 세계에 떨어졌다고 겁을 먹기보단 지금의 상황을 재빠르게 인식하고, 받아들여서 무엇을 해야 살아남는지 같은 직감적으로 알아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을 깨고 나왔을 때 주변 상황을 빠르게 인식하여 런(RUN) 함으로서 목숨을 보전하게 되죠. 자신이 거미라는 것에 놀랄 틈도 없이 많은 형제들이 동족 포식을 해대고, 어미로 보이는 성체는 자식을 잡아먹는 아비규환인 상황이었거든요.

이후 상황은, 엘로 대미궁이라는 엄청나게 큰 던전에서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유체(幼體)가 살아가기 위한 고군분투를 다룹니다. 여주인공은 고등교육과 인간이라는 고등 생물의 지식을 이용해 상황을 분석하고 위험을 피하고, 거미줄로 집을 짓고 그걸로 지나가는 먹이를 사냥하며 살아갑니다. 당연히 이세계 전생물 답게 치트 스킬도 나오고요. 상황에 따른 스킬을 입수하고 고찰을 해가죠. 인간일 적 사고방식 때문에 벌레등 마물을 먹는 것에 거부감을 보일 뻔도 하지만 굶어 죽지 않으려면 먹어야 되는 게 인상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기죽지 않고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아가려는 모습들이 흥미롭죠. 주된 상황 설명은 여주인공의 독백으로 이루어지며 여고생 특유의 하이 톤의 목소리가 느껴지는 듯해서 작가의 필력이 좋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사족이지만 필자는 300여 페이지를 읽는 데 3~4일은 걸림에도 본 작품은 반나절만에 주파할 정도로 몰입도가 좋았습니다. 어쩌면 필자가 단순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태어나자마자 동족 포식 당할 뻔한 인생 하드모드이고, 집도 절도 없이 쫓겨나 홈리스로 전락하고, 거미 인생(줄여서 거생)을 곱씹을 사이도 없이 제 몸 하나 지키기 위해 짱 박혀서 거미줄로 집을 만들었더니 글쎄 인간족이 홀랑 다 태워버리지 뭡니까. 거미줄은 불에 취약하다는 게 밝혀지죠. 인간과 조우했다는 기쁨을 표현하기도 전에 그들을 피해 혼비백산 도망가는 기구한 인생을 그립니다. 배가 고파 결국 남매인지 자매인지 모를 동족 포식을 해야 했고, 그리마(지네 사촌 돈벌레) 떼와 마주쳐 신체가 조각날 뻔도 하고, 뱀은 거미가 주식이 아닐 텐데도 쫓아옵니다. 말벌에 잡혀 등에 구멍이 나고, 죽을 만큼 아파도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장면들이 여간 짠한 게 아닙니다. 그런 고통과 절망을 느끼면서도 조금씩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고 레벨을 올려 진화를 거쳐 가죠. 미궁을 벗어나기 위해 던전 입구를 찾지만 어째서인지 자꾸만 하층으로 내려가고, 결국 지능이 높은 원숭이 무리와 조우하면서 거생일대 위기를 맞는데...

한편 이세계에 전생한 사람은 여주인공만이 아니었습니다. 공간 분리 절단술은 여고 어느 반 하나를 통째로 잘라 버렸고 그 반에 있던 학생 25명과 선생이 말려들었다는 게 밝혀집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인간으로 환생한 학생도 있지만 여주인공같이 마물로 환생한 학생도 있다는 것이군요. 이들도 다 치트 스킬을 보유했고 여주인공과 다르게 유복한 왕족이나 귀족으로 환생했다는 설정에서 조금은 불합리가 느껴지죠. 근데 여기서 문득 여주인공은 미궁에서 잡아먹는 마물 중에서 같은 반 학생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못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주인공은 학급 전체가 말려 들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걸로 퉁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것도 좀 넣어 줬으면 보다 시리어스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군요. 사실 이 생각이 든 연유가, 여주인공이 잡아먹으려 했던 커다란 알이 여주인공은 몰랐지만 사실은 같은 반 여학생이었거든요. 껍질이 깨지지 않아 버려둔 걸 마침 인간족 모험가들이 발견해 왕(王)에게 진상하면서 밝혀지죠.

맺으며: 이세계 전생 치트물 답게 한 1/4은 스킬에 관한 이야기로 덮여 있습니다.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부분이기도 한데, 작가는 이걸 고려했는지 여고생 특유의 말빨과 성향(聲響)을 적극 활용하고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듯이 진행하면서 지루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거기에 여주인공이 뿜어내는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가 분위기를 다운시키지 않는 효과를 보인다고 할까요. 그리고 미처 생각 못 한 실수를 겪으며 다음부터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모습들도 인상적이죠. 다른 학생들의 성별 전환해서 환생했다든가, 여주인공처럼 마물로 환생한 학생도 있고, 유녀(幼女)로 환생한 선생님까지, 오타쿠들이 좋아하는 요소도 빠짐없이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좀 우려되는 건, 여느 치트물이 그렇듯 치트 스킬의 등장이라는 것은 곧 먼치킨으로 진화를 뜻하고 이후 어느 정도 성장을 이루면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번 1권에서 보여준 뱀에게 쫓길 때, 지룡(地龍)의 무섭디 무서운 브레스 공격, 소름 돋는 그리마(지네 사촌 돈벌레) 떼에게 쫓길 때, 마치 선사시대 불을 발견한 호모 사피엔스들처럼 약점인 불을 들고 쫓아오는 인간들의 공포 등을 이후에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이런 요소들 덕분에 1권은 더욱 몰입할 수 있었지 않았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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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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