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블린 슬레이어가 지금의 파티를 꾸린지도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군요. 그리고 누나가 고블린에게 유린되고 죽은 지 1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고요.(아니 11년인가 헷갈리네) 문득 그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옛 집터를 찾았습니다. 이젠 여기에 집이 있었다는 흔적만이 남아있는 곳, 그날 그 일을 평생의 트라우마로 삼아 오직 고블린만을 죽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남자는 세월의 흐름 앞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이젠 알고 있다. 누나가 없다는 현실을, 언제까지고 누나의 그늘에서만 있을 순 없겠지. 하지만 남자는 누나를 쉽게 떠나보내지 못한다. 그것만이 삶의 원동력이니까. 그것만이 내가 사는 의미이니까...


봄이 찾아오면서 새로운 모험가들이 등록하는 계절이 왔습니다. 이야기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고블린 슬레이어를 업신 여기는 신입들이 종종 보이는 시기, 늘 그랬듯 고블린을 얕잡아본 신입들이 썰려나가는 계절이 봄이기도 합니다. 그런 시기에 찾아온 만남, 10년 전 고블린 슬레이어가 겪었던 불행, 누나를 고블린에게 잃은 신입이 그를 찾아옵니다. 소년을 바라보는 고블린 슬레이어는 그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흔한 일이다. 남자들은 먹이로, 여자들은 끌려가 몹쓸 짓을 당한 끝에 고문당하고 죽고 먹히고 운 좋으면 산 채로 구해지지만 결코 좋은 일은 아닌, 그런 일을 겪었기에 고블린 슬레이어는 그 신입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그의 기행이라 쓰고 토벌 퀘스트를 파괴하는 행위를 눈 감아 줬으리라. 발암이 있다면 여기가 배양소지 어디겠는가 하는 일들을 벌이면서 왜 신입들이 고블린에게 썰려 나가는지 소년은 몸소 보여주게 됩니다. 고블린을 얕잡아본 순간 기다리고 있는 건 머리가 두 쪽이 되는 현실이라는 걸 소년은 겨우 깨닫지만 버스는 이미 떠난 뒤입니다. 신입 소년, 빨간 머리 소년은 그렇게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고블린 슬레이어를 업신여기고 여신관을 파티 뒤에서 벌벌 떨며 주문이나 외는 찌질이라고 했을 때부터 이놈은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라고 여겼건만, 고블린 슬레이어는 그를 어엿한 모험가로 만들기로 합니다.


여신관에게도 이 1년은 의미가 큽니다. 그녀 역시 고블린을 얕잡아보는 신입 파티에 낑겨 토벌 퀘스트에 나섰다가 눈앞에서 남자는 먹이로, 여 마법사는 독칼에, 여 무투사는 능욕 코스 타는 걸 보아야만 했죠. 자신도 곧 그렇게 될 운명, 하지만 착한 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땐 백마 탄 왕자님이 구해주는 건 상식이잖아요? 백마는 없지만 희멀건 사람이 구해주긴 했죠. 그게 바로 고블린 슬레이어라는 운명적인 만남, 하지만 그건 그거 이건 이거라는 듯 패닉에 빠져 실례까지 한 그녀를 다독여주기는커녕 종 부리듯 부려먹는 고블린 슬레이어에게 건배. 그날부터 어딘가 위태로운 고블린 슬레이어를 보살펴 준다는 명목으로 같이하게 된 여신관


그리고 1년 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 걸까 하는 고뇌에 뒤덮여 있습니다. 승급의 날, 백자에서 흑요로 올라서고 다시 철 등급으로 올라서기 위해 승급 심사를 받았지만 보기 좋게 미역국을 드신 여신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하는 두 번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대로 가면 남편감이 될지도 모를 고블린 슬레이어랑 둘이서 다닐 때가 좋았는데 어느덧 정신 차리고 보니 엘프녀, 드워프, 리자드맨이 끼어들어 파티는 북적이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죄다 은 등급, 모험가가 되고 1년이 지났다곤 해도 아직 신입티를 벗어나지 못한 여신관에게 있어서 은 등급이란 하늘에 계신 그 무엇과도 같은 존재였죠.


그러다 보니 그녀는 늘 지켜지는 존재고, 활약은 좀 하지만 그녀가 나서서 뭔가를 할 처지가 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맨날 만나는 건 고블린이지만 어찌 된 게 죄다 용급에 버금가는 고블린일지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파티 잘 만나 아수라장을 헤쳐 나오며 실력은 쌓았지만 정작 너 님 파티에서 한 게 뭔데? 이러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뒤늦게 그녀에게 있어서 초보로써의 성장을 기대하며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저 위 빨간 머리를 부하로 거느리고 다른 신입을 모아 나도 할 땐 하는 여자랍니다.라는 듯 그녀의 눈물 어린 성장기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

그렇습니다. 바퀴벌레 한 마리는 손으로 때려잡으며 별거 아니지만 그게 떼로 나오면 어떨까요. 아무리 건장한 남자라도 펄쩍 뛰며 난리 날 걸요? 그게 이 작품에서는 바퀴벌레라는 이름의 고블린인 것입니다. 겨우 한 마리 때려잡고 이따위 잡으며 슬레이어라는 호칭이 부끄럽지도 않느냐? 하는 게 신입들의 마음, 그런 마음을 품고 소굴에 들어갔다가 살아서 나온 녀석은 없습니다. 그러니 고블린의 위험성은 알려지지 않은 것, 그렇기에 접수원 누님은 그 누구보다 고블린 슬레이어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죠. 초보 킬러인 고블린을 잡아주고 떠나간 신입들이 살아서 돌아오게 하는 친절에 또다시 고마움을...

다시 여신관으로 넘어가서, 1년 전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고블린 슬레이어가 아니었으면 지금은 살아 있지 않거나 공허하게 고블린을 생산하는 주머니가 되어있었을 운명, 동료들이 죽어간 트라우마, 언제까지고 벗어나지 못하는 그것,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여신관은 10년 전 고블린 슬레이어가 그랬던 것처럼 현재에 머물기보다 앞으로 나아가길 선택합니다. 사자가 토끼를 잡을 때 온 힘을 다하는 것처럼 토끼 잡는데 온 힘을 다하며 쩔쩔맨다는 조소를 들어도 강하니까 살아남는다가 아닌 살아남아서 강하다는 걸 보여주며 1년 전에 멈춘 그녀의 시계는 다시 흐르기 시작합니다.

빨간 머리 소년이 등장하면서 인연은 돌고 도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게 아닐까 했습니다. 고블린 슬레이어에게 있어서 소년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죠. 여신관에게 있어서 소년은 1년 전 신입 파티에서 동료였던 여마법사가 그의 누나라는 걸 직감했고요. 독칼에 맞아 어찌할 사이도 없이 죽어버린 여마법사,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기 보다 고작 고블린에게 죽었다며 놀림당한다는 억울함에 이곳까지 온 소년, 차마 누나의 최후가 어땠는지 전하지 못하는 여신관, 대신에 그녀는 소년에게 누나의 소원을 우회적으로 전합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꿈이었다고, 이루지 못할 꿈이라도 가치는 있는 것이라고, 소년은 그녀의 말에 무엇을 느꼈을까...

맺으며, 뭔가 시적인 부분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고블린이라는 최약체를 쓰러트리며 분위기 잡는 건 뭔가 아닌 거같아 좀처럼 감정이입은 못 했는데 고블린이라는 주제를 뺀 모험이라는 부분을 부각해서 읽다 보면 참으로 멋진 이야기가 아닐까 했습니다. 하나둘 동료를 만나고 모험을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추억을 되새기는, 분명 나쁜 추억도 있지만 좋은 추억도 있다는 것처럼, 싸움으로 다져진 우정은 어느새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줍니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고 돌아올 곳을 지킨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희망이 불행과 죽음의 그림자에 꺾이지 않고 자신들의 발로 앞으로 나아가는 걸 지켜보는 것... 그것은 분명 멋진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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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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