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이 작품은 이세계 전생 먼치킨류가 아님을 밝혀둡니다. 이 작품은 판타지 세계에서 나고 자란 16살 소녀를 주인공으로 해서 그녀의 시각에서 진행되는 전형적인 일상 생활물인데요. 스승에게서 내리사랑으로 주입받은 연금술을 이용해 약을 만들어 팔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를 담고 있죠. 그 흔한 껄떡대는 인간들도 없으며 마물과의 처절한 싸움이나 인간들 간의 알력과 편견 시비가 없는 아주 평화로운 일상을 그려갑니다. 다만 이러면 정말로 식상하겠다고 느꼈는지 작가는 약간의 흥미로운 설정을 추가합니다. 주인공이자 히로인인 마리엘라의 주변 환경을 확 바꾸면서 그녀로 하여금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한다는 것인데요.


스승이 떠나고 홀로 지내던 어느 날, 스탬피드(마수 대량 증식)가 발생하고 이렇다 할 힘이 없었던 그녀는 재난을 피해 잠들었다 깨어났지만 잠시 잠든다는 게 어찌 된 일인지 일어나 보니 200년 후 미래였던 것입니다.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닌, 날 아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그녀는 스승에게서 주입받다시피한 연금술을 이용해 포션을 만들고 약을 만들어 팔면서 있을 곳을 마련해 갑니다. 하지만 여자애 혼자서 살아가기엔 판타지 세계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다 200년 전 포션을 만들어 팔면서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하며 겨우 입에 풀칠만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그녀로써는 모든 게 무섭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노예 남자를 사들여서 내 편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마치 자발적으로 기둥서방을 구하고 나아가 집 열쇠를 복사해서 건네주는 것 같은 참으로 서글픈 모습을 보여줍니다. 200년 후 막 밖으로 나왔을 때 마물에게 공격받는 흑철 수송대와 인연을 쌓으면서도 애가 의심이라는 걸 안 하는 건지 아니 의심을 안 한다기보다 200년 전 처절하다시피 한 삶의 기억과 마을에 도착해 내가 살던 시대와 다르다는 무서움 때문인지 날 보호해줄 기댈 곳을 찾아 그들(흑철 수송대)의 선심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모습 또한 매우 안타깝게 했는데요. 그야 보통 여느 작품이라면 이런 장면 뒤에 능욕은 필수 코스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우려는 전혀 안 해도 된다는 듯, 필자의 머리에 마구니가 꼈다는 걸 비판하듯 아주 건전하게만 흘러갑니다. 그래서 주인공이 함정에 빠지고 능욕 같은 안 좋은 일을 당하고 일어서는 걸 바라는 분들에겐 이 작품은 맞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로 진행되면서 역경을 이겨내고 우뚝 서는 주인공을 그린다면 그것대로 카타르시스가 있겠지만 이 작품은 안전 노선을 추구할 뿐이군요. 일단 1권 한정해서요. 하지만 노예 남하고 사이가 좋아 주인과 종이라는 선을 넘어 같은 방에서 기거하고 아주 대놓고 반말 찍찍 거리는 판타지에선 있을 수 없는 일도 벌어지긴 합니다. 하지만 초건전하니까 마구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으니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렇게 200년 후 마을에서 자신이 있을 곳을 만들어 가며 궁극적으로 약국을 열어 빌어먹고자 조금식 입지를 넓혀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복선과 그럼 그렇지 하는 먼치킨 이야기를 언급해보자면요. 200년 전 스탬피드로 연금술사들이 떼거지로 몰살 당하고, 200년 후 연금술사라곤 마리엘라 한 사람뿐인 세상(라기 보다 마을), 포션, 200년 전 땅바닥에 굴러다니며 발에 치이던 것에서 200년 후 만드는 사람이 없다 보니 금싸라기보다 매우 귀해진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물론 200년 전부터 포션을 만들어왔던 귀족 가문이 하나 살아남아있긴 한데 널리 퍼트릴 만큼 만들어서 내다 팔 지를 않아서 지금으로써는 마리엘라가 유일한데요. 즉 이것은 신감각 먼치킨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라는 것이죠.


먼치킨이라고 해서 딱히 힘이 세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어느 하나의 특성에서 남들보다 특출하다면 그것이 먼치킨이 아닐까요. 그 예로 포션 빨로 연명이라는 작품도 이에 해당하겠죠. 마리엘라는 그런 부류입니다. 다만 그녀는 지혜도 세상 물정에도 어두워 포션을 무기화하지는 못하는군요. 세상(마을)에서 나만이 포션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노려질 수밖에 없는 필연, 그것들에게서 지켜주는 사람들, 무지한 세상 물정으로 인해 언제 잡혀가 혹독한 시달림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차분하게 슬로우 라이프를 이어갈 수 있었던 건 노예 남과 그녀의 착한 성품에 이끌려 도와주는 주변 사람들 덕분이 아닐까 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복선을 파헤쳐 보자면, 200년 전 홀연히 모습을 감춘 스승의 뒤를 잇듯 스탬피드가 일어난 점이 석연치 않게 다가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걸 마치 예상이라 한 듯 가사 마법진을 가르쳐준 스승, 스승은 어째서 고아 소녀를 데려와 저급 포션만 만들어 최소한의 연명할 정도만 가르쳐도 될 세상임에도 상급을 넘어 특급 포션까지 만들 수 있는 교육을 해준 것일까. 어쩌면 스승은 마리엘라의 성격을 파악하고 지금의 시대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미래에 이 아이의 가능성을 봐줄 시대에서 살았으면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애가 워낙 순박해서 남들에게 이용당하기만 하거든요.

그녀는 말이 순박하지 세상 물정 어둡고 타협이라 쓰고 포기해버리는 성격이 강해요. 포션을 힘들게 만들어놓고 아무도 구입해주지 않자 거의 원가에 가까운 가격에 도매로 넘기게 되고 그걸 구입해간 사람은 고가에 팔아치워 그 사람만 배불리는 악순환, 그럼에도 그렇게라도 해주니 내가 배를 곪지 않는다는 낙오적인 발상은 시대가 그렇게 그녀의 성격을 만들었다곤 해도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군요. 하지만 200년 후 미래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그녀를 이용하기 보다 그녀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인간으로서 대우해주게 되죠. 200년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따스한 감정들, 스승은 그녀에게 이런 감정들을 알려주기 위해 스탬피드를 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맺으며, 복선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필자의 어거지에 가깝습니다. 딱히 신경 쓸만한 내용은 아니군요. 뭔가 의미를 찾지 않으면 필자가 이 도서를 왜 읽었을까 하는 의문점이 남을 거 같아 괜히 언급해 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포션 만들기로 시작해서 포션 만들기로 끝이 납니다. 각종 재료의 설명과 조합 설명, 그리고 만들기, 또 만들기, 흙 퍼서 병 만들기, 노예 길들이기, 밥 먹고, 목욕하고, 빨래하고, 또 약초 뜯어와서 포션 만들고, 설명하고, 그러다 추억에 눈물 흘리고, 석양을 바라보며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일까 하는 철학적인 물음까지, 허구한 날 포션 만들고 밥 먹고 만들고 그것뿐인 일상입니다.


그 흔한 개그도 없고, 위기에 빠질만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자잘한 복선은 몇 개 나왔지만 워낙에 초건전한 작품이다 보니 심각하게는 흘러가진 않겠죠. 있을 곳을 마련하고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집을 장만해서 살아갈 길을 열고, 사람들이 찾아와 왁자지껄하는 모습에 흐뭇해지는 일상, 200년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따스한 감정들이 솟아나는 소소한 일상들,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그저 조그마한 행복과 내일을 위한 양식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는, 그런 슬로우 라이프를 느껴 보고 싶다면 이 작품도 괜찮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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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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