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튼 간에 남의 말을 죽어도 듣지 않는 인간이 있어요. 판타지나 여느 작품을 보다 보면 위험하다거나 너와는 상관없으니 따라오지 말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정상적인 작품이라면 상대가 싫어서라든지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게 아닌 그 사람의 안위를 걱정해 따라오지 말라고 하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상대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고 너 님 여기서 뭐 하세요? 이러며 부득불 기어이 따라나섭니다. 혹은 뒤를 밟든지 해서요. 그러다 결국 걱정대로 일이 터지고야 맙니다. 따라온 사람이 위험에 휩쓸려 죽게 생기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대로 죽든 말든 내버려 두면 되는데 또 구해주다 보면 둘 다 위험에 처해지고 보는 사람은 고구마를 트럭째로 먹게 되죠.


벨은 질풍(류, 엘프녀)이 18계층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갔다는 무뢰배의 말을 듣고 그럴 리 없다며 그녀의 뒤를 밟게 되고 어느 계층에서 따라잡아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류는 벨의 안위를 걱정하여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남기죠. 한때 복수귀가 되어 모든 것을 부숴버렸던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었던 벨은 또다시 그녀가 복수귀의 길을 들어선 게 아닐까 하는 마음에 뒤를 밟게 되고 결국 그녀의 걱정대로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격류에 휘말리고 맙니다. 자, 여기서 벨은 고구마 장사일까 사이다 장사일까의 기로에 섭니다.


벨에게 있어서 류(질풍)는 지금까지 겪었던 전투에서 든든하게 뒷받침 해주었던 소중한 동료입니다. 도움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죠. 아폴론 파밀리아와 항쟁을 벌일 때 하며 18계층에서 계층 터주와의 전투에서 벨은 류가 없었다면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 그녀가 5년 전의 악몽을 쫓아 다시금 미궁으로 발을 들였습니다. 그날 분명히 모두 몰살했을 거라 여겼던 [악]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된 그녀, 다시금 살아나는 그날의 악몽은 그녀를 그 시절의 그녀로 각성 시키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슬픔과 격정에 몸을 맡긴 채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달려가는 그녀, 앞으로 한 발만 내디디면 모든 게 끝난다. 벨이 그녀를 말리기 전까지는...


마지막으로 남은 [악]의 축 한 마리를 앞에 두고 격한 감정 때문에 존댓말도 생략한 채 울부짖는 그녀, 그녀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막아서는 벨, 그걸 보는 독자에겐 고구마가 트럭째 도착합니다. 조금만 벨과의 인연이 얕았으면 썰리는 것은 그였으리라. 기어이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려는못난 놈 때문에 극은 절망으로 치달아 갑니다. 필자는 류를 생각하는 너의 마음은 고작 이 정도였느냐?라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그녀에게 받은 은혜가 얼마이더냐 이 못난 놈아, 그러니 그녀의 마음에 네놈보다 시르가 더 많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지. 벨의 개입은 류에겐 5년 전의 악몽을 더불어 같은 계층에 있는 모두에겐 재앙을 선사합니다.


길드 퀘스트를 받아 파밀리아 연합을 꾸려 내려와 아직 지상으로 복귀 못하고 그대로 류를 쫓아왔던 헤스티아 파밀리아는 물론이고 같은 파벌의 다른 파밀리아까지 위험에 빠져듭니다. 길드에서도 수배령이 내려진 악의 축을 제거하려는 류를 벨이 개입하지 않고 말리지 않았더라면, 질풍에게 매겨진 현상금에 눈이 어두워 무리를 짓고 내려온 속이 시커먼 모험가들이라도 죽어마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악의 축 한 마리가 선사하는 재앙은 모든 걸 집어삼키기 시작합니다. 속이 시커먼 모험가들은 물론이고 벨의 동료들인 헤스티아 파밀리아를 주축으로 한 다른 파밀리아 동료까지 휘말려 가는 재앙 앞에 벨이 내린 결단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전투 신을 보여줍니다. 이게 끝난다면 분명 벨은 레벨 5로 올라서지 않을까 싶더군요. 미노타우로스전을 시작으로 해서 제노스까지 쉴 틈 없는 격류에 휘말리면서 어찌할 수 없는 적을 많이도 맞이해봤지만 이건 차원을 한층 더 끌어올려 줍니다. 파워 인플레란 이런 것일까요. 릴리는 아직도 1이고 벨프는 이제야 2로 올라선 지금 자꾸만 혼자서 멀리 달아나버리는 벨, 벨을 키워주는 것도 좋지만 다른 애들도 좀 키워줬으면 좋겠더군요. 이제야 간신히 동료라 부를 수 있는 존재들이 생겼는데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일까요.


어쨌건 류의 격정이 대단합니다. 5년 전의 악몽을 아직도 고스란히 안고 있었던 그녀의 폭주는 서슬이 퍼레질 정도입니다. 그만큼 동료를 아꼈던 그녀의 마음이 구구절절해지기도 했군요. 복수만이 능사는 아니다라지만 그렇다고 남겨진 자는 과거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도 좋다.는 것도 좋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악몽을 이겨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테죠. 그런데 이제 조금만 하면 되는데 이 토끼시키가 산통을 다 깨 놓는군요.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죄는 자신이 갚아야 되는 게 도리가 아닐까요. 재앙을 맞아 그야말로 뼈와 살이 분리된다는 게 무엇인지 몸소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과정까지 가는 길은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이 작품이 원래 사설이 길었던가요. 12권까지는 이런 느낌이 없었는데 갑자기 사설이 많아진 느낌입니다. 뭐랄까 마치 필자가 쓸데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리뷰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일까요. 보통 이런 걸 두고 남 말할 처지는 아니라고 하긴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대략 200페이지 선에서 끝낼 수 있는 설정이었는데 고놈의 예언하며 뭔가를 두고 설명하는 것하며 쓸데없는 이야기가 장황하게 들어가 있어요. 알맹이는 결국 류를 뒤쫓아 내려가서 재앙을 만나 싸우게 되었다. 요것 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을 들러리 하며 뭔 사설을 그리도 집어넣어 놨는지 필자는 작가가 바뀐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이건 참을 수 있었지만 끝끝내 참지 못 했던 건 매번 장면 바뀜이군요. 이 장면 저 장면 바꿔가며 마치 현장 생중계처럼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맥을 끊어버리는 행위는 학을 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작가는 모처럼 류의 뒤를 밟으며 추리 형식을 기용해 봤다고는 하는데 능력이 되지 않으면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왜 있잖아요. 단서를 발견하고 뭔가를 알아챘는데 계속 이어지지 않고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버려서 사람 멍하게 만드는 방식, 책이 많이 팔리더니 돈 좀 벌었나 봅니다.

맺으며, 벨이 재앙을 맞아 싸우는 장면은 SAO 70몇 개 층에서 해골바가지와 싸우는 장면(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하였군요. 어찌 할 수 없는 적을 맞아 절망이 깃든 얼굴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목이었다랄까요. 단점들이 많이 보여서 책을 덮을까도 했지만 그래도 참고 볼 수 있었던 건 이 장면 덕분이었습니다. 요즘같이 손가락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하는 먼치킨이 주류인 세상에서 이렇게 처절하게 싸우는 주인공도 참 드물죠. 어쨌건 그동안 미뤄져왔던 류의 에피소드가 끝이 나면 그녀도 헤스티아 파밀리아에 들어갈지 사뭇 궁금해졌습니다. 자신을 위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싸워 주고 있으니 호감도가 올라가지 않을 수 없겠죠.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냉큼 팔을 뻗는 거 하며... 이 작품이 19금이었으면 좀 더 솔직해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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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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