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주인공의 입버릇, 은퇴해서 도망가고 싶다. 처음엔 주변 동료들이 나만 놔두고 성장하는 것에 대한 좌절에서 비롯된 도망인가 했죠. 그야 제도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굴지의 헌터로 성장한 동료들을 보고 있으면 지나가는 개에게 물려도 죽을 거 같은 주인공으로서는 좌절할 만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파티 연합체인 클랜을 설립해서 나 대신 새로운 동료를 찾고, 동료들의 사회성을 길러 주인공에게 의존하지 않는 인격체로 성장시키려 한 것이죠. 그 목적은 얼추 달성하는가 싶었는데 말입니다. 파티도, 클랜도 나라에서 주목받을 정도로 성장도 했고요. 그런데 주인공이 하나 간과한 것이 있다면 동료들이 주인공을 무척이나 아낀다는 것입니다. 같은 마을에서 자라 뜻을 함께해서 도시로 나와 헌터가 되었고, 영웅이 되자는 다짐에 따라 이들은 무럭무럭 자랐죠. 그런데 주인공만 소질이 없어요. 죽었다 깨어나도 지나가는 개에게도 지는 형편이죠. 보통 여기서 두 가지 길이 생기잖아요.

동료들은 주인공을 추방할 것이냐, 품을 것이냐. 주인공이 실수를 한 것이 있다면 클랜을 만든 것이겠죠. 그리고 동료들이 자신을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 클랜을 만들면서 주인공이 나서지 않아도 아랫것들에게 다 시키면 되고, 동료들은 주인공이 빠진다고 붕괴할 파티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버린 것에서 주인공은 도망갈 길을 잃고 말은 것입니다. 여기까지라면 놀고먹을 수 있는 인생 만만세일 수 있겠습니다. 거대 클랜 수장 자리에 앉아 하는 건 하나도 없고, 주변에서 보내오는 영광의 눈빛은 다 차지하면서 클랜 운영은 부 마스터에게 다 떠넘기고 있으니 이보다 인생 꿀은 또 있을까 싶죠. 그런데도 주인공은 도망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내뱉는 것에서 이놈 복에 겨워 미쳤구나 싶은데, 그 이유가 이번 2권에서 드러납니다. 동료들은 주인공을 추방하는 것이 아닌 품었죠. 이보다 눈물겨운 동료애가 또 있을까 싶지만요. 그것도 동료들이 제정신일 때나 축복받은 것이죠.

강한 놈이 있으면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쫓아가서 시비 털고, 온 도시를 쏘다니며 지나가는 사람마다 시비 털고, 나보다 약한 놈은 살 가치 없다며 두들겨 패고, 몬스터가 보이면 두들겨 패야 직성이 풀리고, 어른 공경은 어른 공격으로 읽고, 공권력에 대항하고, 연계 플레이에서 협조성은 개나 줘버렸고, 말은 뒤지게 안 듣고, 위아래 없이 욕설을 섞은 독설에, 7살에 시작되는 인생 반항기를 20살 언저리가 되어도 그칠 줄 모르니, 그런 주제에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실력자라는 것에서 피곤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일단 2권까지 주인공이 속한 [비탄의 망령] 파티에 소속된 동료가 두 명(두 명 다 히로인) 등장합니다. 그중 하나는 1권 후반에 등장하였죠. 등장하자마자 그녀의 성격은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리즈.' 뭘 먹고 자랐으면 성격이 이리도 호전적에다 남을 깔보는 성격으로 자랐을까, 부모가 누구인지 상당히 궁금해지는 히로인이죠.

이번 2권에서는 리즈의 여동생 '시트리'가 등장합니다. 언니가 물리적으로 개차반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다르게 동생의 첫 이미지는 그나마 인격체의 느낌을 받게 하였습니다만. 이미 1권에서 주인공에게 풀어 놓으면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슬라임을 맡겼다는 것에서 그녀의 성격은 언니를 초월할 거라는 복선을 낳았었습니다. 이번 2권에서 메인 히로인으로 등장하여 근처 던전에서 일어난 이상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선두에 서서 활약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파티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듯했으나, 실상은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라면 사람 목숨 따위 파리 목숨에 지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미치광이 과학자라는 게 밝혀지죠. 연구를 위해서라면 어린아이도 재료로 쓰길 마다하지 않는 흉악성에서 걸리지 않으면 장땡이라는 준법정신이 더해져 이 세상에 악(惡)이 있다면 바로 그녀가 아닐까 하는 장면들은 소름을 돋게 하죠.

2권을 읽고 주인공이 은퇴해서 도망가고 싶다는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약해서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은퇴하고 싶은 것이지만 실상은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악마(동료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은퇴하고 싶은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곳곳에 숨에 있습니다. 고삐를 잡고 있지 않으면 피아 구분을 하지 않는 리즈와,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 시트리를 보고 있으면 아무 힘도 없는 주인공으로서는 공포 그 자체겠죠. 그나마 그녀들이 맹목적으로 주인공을 보호하고 따르려 해서 지금은 괜찮지만, 문제는 그녀들이 아직도 성장 중이라는 것이죠.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는 건 아닐까. 이미 도적(리즈의 직업)이 전위가 되어 모든 걸 다 때려 부수고 있으며, 연금술사(시트리의 직업)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직업이긴 하지만 네크로맨서(사령사)가 할 짓을 해대고 있으니 이보다 공포가 또 있을까요. 그녀는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를 슬라임을 만들어 주인공에게 맡겼고, 주인공은 1권에서 그걸 잃어버렸습니다.

주인공도 알고 있는 것이죠. 시트리는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고 어딘가 인격적으로 결함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요. 다름 아닌 그녀가 만든 슬라임이라서 결사적으로 찾으려 합니다. 이점에서도 시트리가 인간들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에 대한 단서이기도 하죠. 부록으로 껴있는 외전을 보면 주인공은 몇 년 전부터 이미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고, 결국 주인공도 너무나 비현설적인 그녀들(언니와 동생)의 모습에서 현실을 외면했던 게 지금의 현실도피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하든 건성으로 넘기는 것도 그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번 던전 이상을 해결하면서도 주인공은 꼬치꼬치 캐묻지 않습니다. 제도에서 내로라하는 헌터들 100여 명을 동원한 대규모 작전에서 자칫 몰살 당할뻔하였는데도 주인공은 눈 감아 버리죠. 결국 주인공은 무능해서 은퇴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은퇴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느낌을 받게 합니다.

맺으며: 만악의 근원은 바로 근처에 있다는 진실을 보여준 2권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본 작품은 주인공 일행이 반드시 선(善)의 진영이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금기를 깨트리길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죠. 그런데 주인공 동료들이 왜 이렇게 금기를 어겨가면서까지 일을 저지르는 이유가 뭘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그것은 주인공이 무능해서 그렇다는 게 필자 나름대로의 분석입니다. 요컨대 추방물의 반대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무능한 주인공을 대신해 우리들이 힘내자 했던 게 일그러짐으로 이어졌고, 그 일그러짐은 집착으로 변해버린 게 아닐까 하는, 리즈가 주인공에게 엉겨 붙어 온갖 아양을 떨고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 되었든 지키려 하고, 주인공 이외에는 인간 취급 안 해주는 광기는 정말로 호러 그 자체였습니다. 시트리에게 인간은 그저 연구 재료에 지나지 않다는 섬뜩함, 그러니 주인공으로서는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어쩔 수 없겠죠. 그런 느낌입니다.

아무튼 호러(?)로서는 손색이 없으나 내용은 사실 지리멸렬한 장면들이 많습니다. 하나의 장면을 놓고 설명을 너무 많이 하고, 여러 사람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건 좋은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같은 장면을 리플레이 해서 감정이입을 방해합니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그러면 짜증 나잖아요? 그런 장면들이 제법 있습니다.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를 넣어 페이지를 낭비하고, 시트리를 이용해 독자들을 농락하는 후반부는 좀 어이가 없었군요. 던전 이상 사태를 일으킨 범인의 정체에 대한 나름대로 추리할 수 있는 재료를 넣었으나, 그것을 소용없게 만드는 진범의 정체, 그 진범을 도왔던 흑막들은 450여 페이지나 할애할 정도 임팩트가 있었나? 그 흑막들은 시트리의 정체와 성격을 밝히기 위한 장치적 요소로 이용되긴 했지만 거의 잡범 수준으로서 형편이 없었습니다. 이런 형편없는 인물들로 450여 페이지나 잡아먹다니 너무한 거 아닌지. 살짝 이 도서를 구매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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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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