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마왕을 제어하는 여덟 번째 마왕으로 각성했던 라티나, 언니인 크리소스를 뺀 여섯 마왕이 데일에 의해 절단된 지금 그녀는 봉인에서 풀려나 자신의 고향인 바실리오에서 언니와 데일의 비호 아래 요양 중입니다. 되고 싶어서 여덟 번째 마왕이 된 것도 아닌데 처해진 불합리와 사랑하는 데일과 떨어진 기나긴 세월 동안 이별을 해야만 했음에도 그녀는 여섯 마왕(1)을 저주할 만도 하겠건만 오히려 자신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등 이 착해빠진 소녀를 어찌할꼬 같은 일상이 이어집니다.


사실 여기까진 별다른 에피소드는 없습니다. 봉인의 후유증으로 아직 몸이 성치 않은 라티나를 보살피는 크리소스는 동생 바보가 되어 있었고, 데일은 딸 바보를 졸업하고 부인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라티나가 다 컸다고 아주 노골적인 장면이 들어가기 시작하는군요. 그녀의 몸이 성치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기진맥진할 정도로 밤일에 열중하시는 데일, 동정들 가슴에 스크래치를 새겨도 유분수 같은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이게 다 라티나가 언니인 크리소스와 데일이 바람난 게 아니냐는 오해에서 비롯되긴 했지만요.


그렇게 일련의 소동이 끝나고 라티나는 몸을 추슬러 크로이츠에 돌아옵니다. 테오가 유창하게 말을 하고 에마(테오 동생)가 벌써 아장아장 걷는 것에서 라티나가 봉인된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게 할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전형적인 다녀왔어! 어서 와! 같은 클리셰를 달리지만 누군가 자기를 기다려 주고 환영해준다는 건 무척이나 기쁜 일일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라티나와 크리소스의 과거


라티나와 크리소스의 부모인 모브(엄마)와 라그(아빠)의 이야기


작가는 키잡을 좋아하는 듯하군요. 모브를 만났을 때 라그는 인간으로 치면 40대 정도고 모브는 10대 중후반 정도, 처음은 모브가 두 번째 마왕에 의해 첫 번째 마왕 후보가 도륙된 사건에서였습니다. 그 사건으로 마음을 닫은 모브에게 말 좀 붙여보라고 떠밀려 온 게 라그, 그런 그에게 모브의 첫마디 '나와 엮이면 죽게 됩니다.' 아마 이때 모브는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으로 그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았지 않나 합니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시작된 그와의 일상, 상냥함은 툰드라의 만년설도 녹인다고 했던가요. 자기 이익을 위해 도구로 밖에 보지 않는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사심 없이 상냥하게 대해주는 라그에게 끌리는 건 필연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삼신 할매에게서 첫 번째 마왕을 잉태할 거라는 점지를 받고 내가 마왕의 아빠가 될 거라는 많은 남정네들에게 시달림 끝에 그녀가 도망치다시피 찾은 곳은 라그의 집이었군요. 이 뒤의 일은 핑크빛으로 이어지는 건 예정된 수순이고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맺어지면 그가 단명할 거라는 걸 예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를 품는 라그의 신경줄에 건배, 이건 숭고한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자신의 미래보다 태어날 아이를 위해 그리고 그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놓은 그에게 축복을... 그렇게 태어난 크리소스와 라티나, 원래는 한 명, 크리소스만 태어날 운명이었건만 얄궂게도 둘이 되면서 예언은 종막을 향해 달려갑니다.


라그가 단명할 거라는 예언, 라티나가 첫 번째 마왕이 될 크리소스를 해할 재앙으로 등극할 거라는 예언


이들 4인 가족이 보여주는 단란함은 훈훈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브와 라그가 보여주는 딸 바보는 데일을 넘어설 정도고요. 작가가 표현을 어찌 이리도 자세하게 해놨는지 꼬물꼬물 거리는 크리소스와 라티나를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했군요. 거기다 일러스트도 수준급이라 이건 뭐 힐링 정도가 아니라 죽은 사람이 되살아날 정도로 따뜻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그러던 것이 라티나가 첫 번째 마왕이될 크리소스를 해할 거라는 점지가 나오면서 분위기는 180도 바뀝니다. 풍비박산 난 가정, 딸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부모의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앞선 훈훈함을 무색게 할 정도로 비장하기 그지없었군요.


두 번 다시 못 볼 딸과 남편을 떠나보내야 하는 엄마의 슬픔, 서로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손을 필사적으로 내미는 자매의 슬픔, 신탁에 의해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던 라티나를 국외로 빼돌리며 허약한 몸을 이끌고 그녀(라티나)의 행복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는 라그의 마지막 생이 허망하게만 흘러가는 것에서 보는 이의 가슴을 찢어 놓습니다. "괜찮아"라는 단어가 이리도 슬프게 다가올 줄 이전에는 미처 몰랐군요. 숲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혼자 남게 될 라티나의 행복을 빌어주고 축복의 말을 읊조리는 라그, 이런 일련의 일러스트는왜 이리 비장한지 가슴 먹먹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맺으며, 사실 중반까진 이전 5권의 에필로그에 해당되어서 조금 지루했습니다. 몇 년이나 봉인되어 있던 히로인이 몸을 추수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이 있을 자리에 돌아오는 장면은 예나 지금이나 행복한 결말이자 훌륭한 클리셰라고도 할 수 있죠. 하지만 모브와 라그의 인생을 곁들이면 결코 행복한 결말이라고 하기엔 뒷맛이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요컨대 '저주받은 아이가 미래에 사람들을 해친다는 예언은 그 아이로 하여금 그렇게 내몰리게 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라는 결국은 저주받은 아이를 저주받게 하는 건 어른들이라고 역설하고 있는 듯하였군요. 운명을 개척하기 보다 운명을 거스르지 않음으로써 필연이 되는 멸망을 꼬집고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1. 1, 크리소스는 친언니이자 옹호자, 라티나를 죽일려던 여섯 마왕들을 설득해 봉인 하도록한 장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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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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